XI.강줄기 따라걷기/한강 따라 걷기

한강 따라 걷기32(방화대교-일산대교-전류리 포구)

시인마뇽 2026. 3. 24. 23:55

 

탐방구간: 방화대교-일산대교-전류리포구

탐방일자: 2026. 3. 19()

탐방코스: 방화대교-경인아라뱃길갑문-풍곡리쉼터-일산대교-강서습지공원-전류리포구

탐방시간: 79-1449(7시간40)

동행       : 나 홀로

 

 

 

 한강을 따라 걷는 길에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운하(運河)를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우리나라의 운하는 경인아라뱃길과 포항운하인데, 그중 경인아라뱃길을 이번에 가까이 가서 본 것입니다.

 

  경인아라뱃길은 행주대교-계양동 구간은 기존 굴포천을 준설하고, 계양동-시천동 구간은 김포평야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뚫는 방법으로 건설해 개통한 운하입니다. 인천시서구오류동의 서해에서 서울시강서구개화동의 한강을 잇는 길이 18, 80m, 수심 6.3m의 주운(舟運) 수로(水路)인 한강아라뱃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조운(漕運)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세곡미(稅穀米)를 실어 나르는 것은 육로의 수레가 아니고 수로의 조운선(漕運船)이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우용교수는 그의 논고 한강과 황해가 만난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조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고려왕조는 조세를 수로로 징수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국초부터 조운 항로와 조창을 지정, 정비했다. 조창은 조세곡을 일차 수납해 두었다가 세곡선을 옮겨 싣기 위한 일시적인 저장고였다. 고려의 조창은 13개였으며, 한강 변에는 현재의 충주에 덕흥창, 원주에 흥원창이 설치되었다. 조창마다 적재량 200석 규모의 선박 20여 척이 배치되어 추수 이후 세곡 운송을 담당했다. 삼남지방 각 조창에서 출발한 조선은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한강하구를 거쳐 예성강에 이르렀다. 한강 상류의 충주와 원주에서 출발한 조선은 한강 물길을 따라 강화도 앞에 이른 후 북상하여 역시 예성강에 도달했다. 고려시대에도 한강은 가장 중요한 조운로(漕運路)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계룡산 기슭의 수도 건설공사를 중단하고 한양 천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이유는 순전히 조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수확된 곡물 중 조세곡과 서울 거주 지주에게 납부하는 소작미는 모두 수로를 통해 서울로 옮겨졌습니다. 충청도 내륙지방과 경상도 북부, 강원도 일대에서 산출된 곡식은 한강 상류 수로를 이용했고, 나머지는 서해안 해로와 한강 하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개착(開鑿) 공사를 한 운하는 굴포운하와 굴포천운하입니다. 고려시대에 개착 공사를 시작한 굴포운하는 삼남 지방 세곡미의 조운선이 조류가 빠르고 풍랑과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해 해난 사고가 잦은 충청남도 태안의 안흥량 해역을 피해서 운항하기 위해 몇 차례 개착공사를 추진했으나, 암반을 뚫지 못해 모두 실패했습니다. 2006년 금북정맥을 종주하는 길에 태안군 태안읍과 서산군 팔봉면을 경계 짓는 굴포운하지를 지난 적이 있습니다. 가로림만 상류인 팔봉면 이송리와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흥인천 사이의 약 3키로를 굴착해 수로로 연결해 삼남 지방 세곡의 조운을 용이하게 하고자 고려 인조 때인 1134년부터 약 550년간 시도한 몇 차례의 운하 굴착은 실패했고, 조선조 현종 때인 1668년 인근 여러 곳에 조창을 지어 운하의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는 굴포운하지 안내문을 읽고 나서 그 옛날에 운하를 내겠다는 선조들의 위대한 발상에 놀랐던 일이 새삼 기억났습니다. 굴포운하공사가 실패하자 대안으로 추진된 공사는 태안반도 남쪽 끝의 좁은 판목을 끊어 해로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판목운하 개착으로 안면도가 섬이 되었고 조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굴포천운하는 강화도와 김포반도의 물길이 거세어 손돌목에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많이 발생하자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판 것입니다. 이 개착공사는 처음 고려시대 때, 최이(崔怡)가 현재 인천시부평구가좌동 일대인 안남에 도랑을 파서 바다와 연결하고자 하였으나 중단되었습니다. 조선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가 다시 운하 건설을 시도했으나 굴포천(인천시와 경기도김포시고촌면 일대)만 건설하고 원통현(圓通峴, 현재 인천시 부평구 부평 3) 400m의 암석층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2005년 가을 한남정맥을 종주하는 길에 임시가교로 공사 중인 굴포천 운하를 건넌 일이 있습니다. 이 개착공사의 완공으로 2012년에 개통된 운하가 바로 경인아라뱃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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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본역에서 새벽 514분발 첫차를 타고 5호선 종점인 방화역에 도착하기까지 약 1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방화역에서 이번 탐방의 출발점인 방화대교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아침73분 방화대교를 출발했습니다. 개화나들목을 막 지나 도착한 방화대교 아래에서 하차해 한강 변의 조류관찰대를 먼저 들렀습니다. 아직 햇살이 퍼지지 않아서인지 새들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대신에 강 건너 덕양산의 행주대첩비와 그 너머 먼발치에 자리한 북한산의 삼각봉, 즉 백운대, 만경대와 인수봉을 조망했습니다. 맹꽁이와 수달이 살고 있는 강서습지공원에 낸 인도를 따라 걸어 행주대교에 이르렀습니다.

 

  행주대교에서 경인아라뱃길을 건너 전호야구장에 이르는 길은 복잡해 잠시 길을 잘못 들기도 했습니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미 해병과 한국 해병이 9. 20- 21일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행주나루에서 행주산성 방향으로 한강 도하 작전을 수행했던 행주나루도하지를 지났습니다. 이내 도착한 판개목쉼터에서 경인아라뱃길이 시작되는 아라한강갑문을 조망했습니다.  판개목쉼터는 "굴포천(판개울)을 만든 선조들의 자취를 따라 땅을 파고 물길을 열어 한강과 만나는 곳(물목)이니 판개목이라 명하고 이름 기념하고자 조성한 쉼터"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847분 아라뱃길이 시작되는 김포항의 전호교를 건넜습니다. 아라한강갑문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아라뱃길 위에 놓인 전호교를 건너 김포 땅에 발을 들였습니다. 뱃길에 접해 자리한 아라여객김포터미널과 호텔마리나베이서울을 카메라에 옮겨 실은 후 전호1리정류장을 지났습니다. 전호야구장 앞에서 금포로를 따라 걸어 굴포천 위에 놓인 영사대교를 건너자 넓게 터잡은 깔끔한 남원윤씨영사정 묘역이 잘 보였습니다. 조선 국왕 정조가 김포의 장릉으로 행차할 때 이곳에서 쉬면서 영원히 생각이 날 것이라면서 이름 지은 정자 영사정(永思亭)은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고 하는데, 시간 여유가 없어 터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다리 건너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금포로를 따라 조금 걷자 이내 신곡수중보가 보였습니다. 신곡수중보란 한강하류인 김포시고촌읍과 고양시덕양구 사이에 위치한 전장 1,007m의 수중보로 김포대교에서 한강 하류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신곡수중보는 김포쪽에 위치한 길이 124m의 가동보와 고양쪽의 강물 속에 설치한 길이 883m의 고정보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 제가 본 것은 김포와 하중도 백마도를 연결하는 가동보의 구조물입니다.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그해 6월 신곡수중보의 준공으로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용수를 확보하고, 각종 선박이 다닐 수 있도록 주운 수심을 유지하며, 바닷물의 역류에 따른 염수 유입을 차단하고, 북한 무장공비의 수중 침투를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신곡수중보에 대한 긍정평가의 주된 내용인데, 수질 악화를 이유로 철거하자는 의견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사정입구교차로를 지나 강변의 자전거길을 따라 걷다가 한강에서 벗어나 나지막한 구릉을 넘어 신동마을입구정류장에 이르렀습니다.

 

  1011분 풍곡리쉼터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신동마을입구정류장에서 한강 좌안의 철책 옆에 낸 자전거길을 따라 걸어 풍곡리쉼터에 이르자 자전거를 타고 온 연세 든 몇 분들이 먼저 와 쉬고 있었습니다. 한 컵에 1,000원 하는 믹스커피를 사 마시면서 10분 가까이 쉬었다가 15Km 가량 떨어진 전류리포구로 향했습니다. 자전거연결터널 입구를 지나 방수로 다리에 이르자 철책이 자전거길 아래로 물려 쳐져 있어 일산대교와 그 너머 파주시 교하의 심학산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방수로다리를 건너 이어지는 길은 자전거우선도로로 가끔 화물차가 다녀 신경이 쓰였습니다. 한강시네폴리스 IC로 이어지는 방사형의 복잡한 교차로 아래를 지나고 걸포사거리로 빠지는 지하차도입구를 지나 일산대교에 다다른 시각은 1138분입니다.

 

  일산대교는 고양시일산서구범곶동과 김포시걸포동을 잇는 한강의 다리입니다. 교량의 길이가 1,840m이고, 폭이 28.5m로 왕복 6차선의 일산대교는 한강의 다리 중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하구 쪽에 위치한 다리로, 이 다리 덕분에 제 고향 파주 - 김포를 서울 시내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6분 감암포에 이르렀습니다. 일산대교를 지나자 동쪽으로 조금 튀어나온 감박산이 잘 보였습니다. 이 산은 군부대가 점하고 있어 자전거길은 계양천을 건너서부터 한강에서 벗어나 왼쪽 고개로 이어졌습니다. 지도상의 감암포는 계양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합수점 인근인데, 포구가 사라진 지 오래되어 감암포의 옛 자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감암귀범(甘岩歸帆)이 김포팔경의 제2경으로 선정된 것은 감암포로 들어오는 돛단배들이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해서라고 합니다.

 

  감박산을 왼쪽으로 에돌아 다시 한강변에 들어서자 자전거길 왼쪽으로 넓은 김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이 펼쳐졌습니다. 평일인데도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봄을 맞겠다는 춘심이 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코센터에서 시작해 커뮤니티 가든에서 끝나는 꽤 넓어 보이는 김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은 벚나무산책길, 습지생태원, 참나무류 숲, 오방원, 낱알 들녘, 송송(松松) 숲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찾아와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이 공원을 거닐며 올해 들어 처음으로 봄꽃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봄꽃은 수줍은 듯 살포시 노랑 웃음을 머금은 산수유입니다.

 

  제가 이 공원에서 눈여겨 본 것은 유수지(遊水池)입니다. 여름철 폭우에 대비해 빗물을 임시 저장하고자 설치한 여기 제촌유수지의 시설용량은 18만 톤이 조금 더 됩니다. 보통 때 유수지에 물을 채우지 않고 비워두는 것은 홍수 때 빗물을 가둬두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러한 유수지는 한강 변을 걸으면서 다른 도시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14시 정각 봉성하천을 건넜습니다. 제촌유수지를 지나자 금포로 너머로 용화사가 보였습니다. 처음 볼 때는 2층 누정이라 생각했는데 정자가 아니고 사찰이라는 것은 귀가해 사진을 살펴 보고 알았습니다. 제가 용화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절이 한강 변에 자리한 몇 되지 않은 고찰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용화사는 조선 태종 5년인 1405년에 창건된 절로 운양산 자락에 위치해 한강 하구가 시원하게 조망된다고 합니다. 이 절과 관련하여 뱃사공 정도명이 조공(租貢)을 싣고 가다 운양산 앞에 배를 대었는데, 꿈에 부처가 나타나 배 밑의 석불(石佛)을 모시라고 일러주어 이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절에서 내려다보는 강물결이 아름다워 운양추파(雲陽秋波)’는 김포팔경의 하나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다만 본 용화사를 지나 봉성포천을 건넜습니다. 봉성포천이 한강과 만나는 봉성포천/한강 합류점을 지나자 자전거길은 시계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오른쪽으로 이어졌습니다. 금포로 건너 봉성제2배수장이 엄청 큰 것으로 보아 홍수 때 한강으로 퍼내야 하는 유수량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봉성포천을 건너 자전거 길을 따라 진행하다 이내 자전거도로전방폐쇄안내문을 보았습니다. “지반침하로 인한 복구공사가 예정됨에 따라 한강철책 자전거도로를 일시 폐쇄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봉성산 아래 금포로 옆 평화누리쉼터로 올라갔습니다.

 

  철책길을 걸으며 강변의 풍경을 사진 찍지 못해 안타까워하다가 하동천을 건너 평화누리쉼터에 올라서자 지나온 철책 길과 강변 풍경이 철책에 가리지 않고 온전하게 눈에 들어와 좋았습니다.

 

  봉성산 아래 언덕에 자리한 평화누리쉼터에서 제가 눈여겨 본 것은 봉성포천 하구 건너 상현달 모양을 하고 있는 진흙뻘입니다. 강물이 휘어져 흐르는 곡류하천은 안쪽과 바깥쪽의 유속이 같지 않습니다. 강물이 빨리 흐르는 바깥쪽에는 하식애가 생기고 물 흐름이 느린 안쪽에는 모래나 자갈이 쌓여 포인트 바가 생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일산대교를 지난 한강은 시계방향으로 완만하게 반원을 그리며 북서쪽으로 흐르다 봉성포천/한강의 합류점에 이르러서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잔류리 포구 쪽으로 흐릅니다. 이런 강 흐름의 안쪽은 한강 우안의 파주출판단지 앞 한강 변이고, 바깥 쪽은 제가 바라보고 있는 한강좌안의 봉성포천/한강의 합류점 부근입니다. 안쪽에 생긴 포인트 바는 강 건너 한강 우안의 산남습지인 것 같은데, 한강 좌안의 바깥쪽으로 하식안(河蝕岸)이 보이지 않는 것은 강변이 산이 아닌 들판으로 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봉성포천/한강 합류점 앞 한강에 상현달 모양의 뻘이 드러나 보이는 것은 봉성포천이 실어 나른 토사가 두 하천의 합류점 앞에 쌓여 생긴 것 같습니다. 이렇게 쌓인 뻘 흙이 한강 하구에서 역류해온 바닷물을 만나 염석효과로 응고된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인데, 과연 그런 것이지 좀 더 알아보고자 합니다.

 

  1449분 전류리포구에서 32차 한강탐방을 마쳤습니다. 하동천을 건너 올라선 평화누리쉼터에서 전류리포구까지는 금포로 오른쪽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편의점 e-mart를 지나 다다른 전류리 포구에서 탐방을 끝내지 않고 200m가량 더 걸어간 것은 2019년 가을 걸었던 평화누리길 3코스의 끝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6년 만에 다시 찾아가 그 지점에 서자, 그동안 참으로 열심히 강을 따라 걸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섬진강, 영산강, 금강, 낙동강은 진작에 강줄기 따라 걷기를 모두 마쳤고, 이번에 따라 걸은 한강은 유도 앞 하구까지 30Km가량 남겨 놓고 있습니다.

 

  전류리포구 건너편 정류장에서 7번 버스를 타고 운양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중간에 중학교동창을 만나 저녁 식사를 같이 한 후 밤이 되어서야 산본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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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길로 돌아가지 않고 지름길로 질러가려는 인류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바로 다리, 터널과 운하가 아닌가 합니다. 육로는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어 운행 거리를 대폭 줄였고, 해로는 운하를 내어 운항 거리를 획기적으로 줄였습니다. 서울에서 부산 갈 때 고속도로가 일반도로보다 운행거리가 짧은 것은 과감하게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어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 조운선이 태안반도를 빙 돌고, 강화도-김포 사이의 염하강을 거쳐 조강으로 빙 돌아 한양으로 운항해야 했던 것은 암반을 뚫지 못해 굴포운하와 굴포천운하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철로와 고속도로가 늘어나면서 육운이 발달해 수운에 대한 의존도가 많이 줄었습니다. 경제력이 세계 10위를 오르내리는 우리나라에서 조선왕조가 중단한 굴포운하와 굴포천운하 중 굴포천 운하만 개착해 한강아라뱃길을 내고, 굴포운하를 그대로 놔두는 것은 경제력이나 기술력이 받쳐주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두 운하를 열었을 때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와 주변 생태계를 오염시키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 그리했을 것입니다.

 

  경인아라뱃길의 개통에 소요된 총사업비는 22,458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2012년에 개통한 한강아라뱃길이 아직도 논란이 되는 것은 목적했던 바를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운하를 통해 운송되는 물동량이 계획했던 바의 10%도 안될 정도로 적다는 것과 수질오염입니다. 이런 문제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맞대고 숙의해 보다 빨리 해법을 찾았으면 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