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한강 따라 걷기

한강 따라 걷기33(전류리포구-애기봉-애기봉평화생태공원입구)

시인마뇽 2026. 4. 1. 05:20

탐방구간: 전류리포구-애기봉-애기봉평화생태공원입구

탐방일자: 2026. 3. 26()

탐방코스: 전류리포구 석탄배수펌프장-사암2리마을회관-마근포-가금리-한재당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애기봉 전망대-애기봉평화생태공원입구

탐방시간: 730-1530(8시간)

동행      : 나 홀로

 

 

 

  한강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강()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한강은 대수(帶水), 아리수(阿利水), 한수(寒水)로 불렸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한서(漢書)지리지에는 대수(帶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 아리수(阿利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 건국설화에는 한수(寒水)로 되어 있다.”

 

  한강(漢江)은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교류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며, 고려시대에는 열수(洌水),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을 흐르는 강이라는 뜻에서 경강(京江)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한강은 구간에 따라 달리 불리기도 합니다. 태백시의 검룡소에서 골지천이 시작되면서 한강도 같이 시작됩니다. 골지천이 송천과 합류하는 정선의 아우라지에서 조양강이 시작되고, 동대천과 조양강이 합류하는 정선의 가수리에서 동강이 시작됩니다. 평창강이 동강과 합류하는 영월에서 남한강이 시작되고, 북한강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양평의 양수리에서 한강이 시작됩니다. 임진강이 한강에 합류되는 파주의 오두산 아래에서 조강이 시작되고, 유도에서 서해로 흘러들면서 조강이 끝나면서 한강도 같이 끝납니다.

 

  골지천에서 조강에 이르는 물줄기는 한강의 본류로 발원지인 검룡소에서 하구인 유도까지 흐르는 강줄기를 총칭해 한강이라 부릅니다. 남한강을 북한강과 대비해 말할 때는 발원지인 검룡소에서 북한강과 만나는 양수리까지를 이르기도 합니다.

 

  이번 한강 탐방에서 주력해 살펴보고자 한 것은 한강의 마지막 구간을 흐르는 조강(祖江)입니다. 조강이 어떤 강인가는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의 평화전시관에 전시된 한 전시물에 잘 소개되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예로부터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들어가는 마지막 구간을 조강'이라 불러왔다. 조강(祖江)은 바다가 시작되는 '원조의 강', 또는 여러 강물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으뜸 강'이라는 뜻이다. 조강은 김포의 서쪽 바다와 동쪽 강물을 연결해 주는 수운 통로로서, 경상 · 전라 · 충청 등 삼남 지방의 물자와 인력들이 이곳을 거쳐 한양도성으로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특히 조선 시대 강녕포와 조강포, 마근포에 형성된 포구마을들은 세곡선과 어선이 쉼 없이 드나들며 물류와 상업이 발달했던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수로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만큼 외세의 침입으로 크게 피해를 입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는 남북의 치열한 전투로 커다란 희생을 치렀으며, 이후 민통선이 그어져 많은 사람들이 오랜 생활 터전을 잃고 떠나야 했다. 조강은 이처럼 풍요와 아픔의 역사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제가 조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4년 김훈의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의 아래 글을 읽고 나서입니다.

 

  “조강(祖江)은 여러 강들의 통합함으로서 깊고 크다. 넓고 느리게 흘러서 일몰의 서해로 나아간다. 한반도 중부내륙의 모든 수계(水系)는 조강에서 합쳐져 소멸한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합쳐서 내려 온 한강은 김포 들판의 북단에 이르러 임진강과 만난다. 거기까지 흘러온 임진강은 한탄강과 그 유역의 모든 수계를 이끌고 가득 차 있다. 크고 넓은 강들이 합쳐지는 자리에는 만남의 흔적이 없다. 강들은 본래 그러한 것처럼 만난다. 거기서부터 조강은 강화도 북단과 개풍군 남단 사이로 유로(流路)를 열면서 서해로 나아가다가 다시 개성에서 내려오는 예성강을 끌어들인다. 하구의 조강은 물이 아니라 시간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면서 바다에 닿는다.”

 

  이번에 처음 조강을 따라 걸었으니, 이름을 알고서 현장을 탐방하기까지 22년이 걸린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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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잡한 출근 시간을 피하려고 오전 514분에 4호선 첫 차를 타고 산본역을 출발했습니다. 금정역에서 1호선으로,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김포공항역에서 김포골드선으로 환승해 김포시의 운양역에 도착한 시각은 656분으로 20분 가까이 기다렸다가 7-2번 버스를 타고 전류리포구로 이동했습니다.

 

730분 전류리포구를 출발했습니다. 한강 하구에 가장 가까이 자리한 전류리포구는 안개가 낀 데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아 스산했습니다. 전루리포구역에서 200m가량 이동해 평화의 길3코스가 끝나는 삼거리에서 철조망이 쳐진 한강 좌안의 철책 옆 제방길로 들어섰습니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오가는 차들이 많아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4Km가량 걸어 석탄4리 철새도래지조망대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쉼터가 몇 곳 있었고, 통행 차량이 감속을 해야 지날 수 잇는 군부대 앞 서행지역도 몇 곳 지났습니다. 이 철책 길이 생소하지 않은 것은 2019년 가을 평화누리길의 3구간을 따라 걸을 때 한번 걸은 적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때는 철책길 왼쪽 아래 김포 벌에 수많은 철새들이 내려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철새들이 북쪽 고향 나라로 돌아가서인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848분 석탄리철새조망지에 다다랐습니다. 국사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합류점에 자리한 석탄리철새조망지에 이르자, 박제된 재두루미 두 마리가 저를 반겼습니다. 망원경이 설치된 석탄리철새조망지에서 한강 철책길을 벗어나 북서쪽으로 설치한 관개수로 옆길로 들어섰습니다.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한 논배미들이 꽤 넓게 펼쳐진 후평리 들판을 보고 나자 초등학교 때 배운 김포평야가 이렇게 넓은 들판이었다 싶어 감탄했습니다. 관개수로 변에 주차한 많은 차 들에게 눈길이 간 것은 저 차들을 몰고 온 낚시꾼들도 저처럼 새벽같이 집을 나섰을 것 같아서입니다.

 

  한 달만 늦게 이 길을 걸었다면 땡볕을 가릴 나무 그늘이나 쉼터가 없어 땀깨나 흘렸을 텐데 아직은 봄의 초입인 데다 아침 안개가 가시지 않아 걷기에는 딱 좋았습니다. 철책 길은 점점 멀어지고 강 건너 파주 쪽은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바닷물이 넘나드는 한강하구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후평리의 아리수낚시터를 막 지나 가지골버스정류장에 이르러 연화사입구-가지골-시암2리마을회관안내글을 보고 이 길이 시암2리마을회관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가지골버스정류장에서 5분 거리인 파평윤씨원평공파하성후평문중 숭모단에 다다른 시각은 952분입니다. 관리가 잘되어 깔끔해 보이는 숭모단 아래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나마 감미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숭모단을 출발해 석평로를 따라 걸어 갈릴리수양관이 멀지 않은 나지막한 사거리의 고개를 넘었습니다. 이내 다다른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잘 못 들어선 것은 얼마 후에야 알고 주민 한 분께 길을 물어 시암2리마을회관으로 가는 길을 확인했습니다.

 

  시암2리마을회관으로가는 길에 만난 두 마리의 백구(白狗)가 저를 보고 짖으며 따라와 주인인 듯한 분에게 개를 불러달라고 하자, 이 개들은 유기견으로 주인이 없다면서 아무도 물지 않으니 안심하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분 말씀대로 그 개들은 제게 다가오면서 몇 번 짖다가 이내 물러났지만, 만약 이 유기견에게 물린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따져 책임을 물을 수 없어 참으로 난감할 것 같아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저는 개를 유독 무서워해 혼자서 외지의 시골길을 걸을 때는 반드시 스틱을 갖고 다녔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가지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1034분 시암2리마을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걷고 있는 김포 지역이 제 고향 파주와 마찬가지로 최전방지역이어서 군부대가 출입을 통제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발원지인 태백의 검룡소에서 한강을 따라 여기까지 걸어온 저로서는 웬만하면 최대한 한강과 가까이 걸으려 하지만, 여의치 못한 경우 한강에서 떨어져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석탄리철새도래지에서 시임2리마을화관으로 이어지는 ‘dmz평화의 길이 한강에서 벗어나 후평리들판으로 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구불구불한 시멘트 도로를 따라 걸어 도착한 시암2리마을회관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썰렁했습니다. 마을회관 바로 옆에 민방위주민대피시설이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최전방지역임을 실감했습니다.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켜왔을 노거수 느티나무를 사진 찍은 후 차도를 따라 걸어 일직선의 관개수로에 다다르기까지 10분 남짓 걸렸습니다. 길이가 800m 남짓한 넓은 관개수로를 따라 걸어 한강 좌안의 철책 앞에 이르자 ‘dmz평화의 길은 왼쪽으로 조강과 나란히 이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400m 가량 걷자 관개수로가 끝났고, 다시 400m 가량 걸어가자 관개수로를 막 건너 군부대가 주둔한 야산 앞에서 조강을 따라 걷는 강안 길은 끝났습니다.

 

  야산을 왼쪽으로 돌아 나지막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조강과 만나는 지도상의 마근포리에 이르자 애기봉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마근포리에서 시계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애기봉 쪽으로 흐르는 조강을 따라 걸으려면 남과 북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돌아가는 정세로 보아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도상의 마근포리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농로로 들어섰습니다. 이 농로를 따라 걷다가 사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꺽어 호돌이농장을 지났습니다.

 

  1214분 사거리 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샌드위치로 요기를 했습니다. 호돌이 농장을 지나 양택천에 이르자 사거리에 자리한 쉼터가 보였습니다. 쉼터가 거의 없는 ‘dmz평화의 길’ 3코스를 걸으며 느끼는 불편은 공공화장실 또한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길/평화누리길 쉼터에 앉아 점심을 든 후 가금로를 따라 걸어 애기봉입구로 향했습니다.

 

  애기봉농장을 지나 요즘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4H표지석이 노거수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시골 마을의 청년들이 벌였던 4H 운동은 Head(), Heart(), Hands(), Health()를 함양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앞으로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려면 이 운동은 앞으로 제게 더욱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왼쪽으로 은혜의 교회 수양관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가금로를 따라 걸어 박신 묘역을 들렀습니다. 김포 출신으로 여말선초의 문신인 박신(朴信, 1362-14440)은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으로 세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고 박신의 송덕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박신 묘역에는 사당 저헌재(樗軒齋)와 그 뒤로 박신과 부인들의 묘지 3기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묘역 앞의 향나무 두 그루는 살아생전에 마음을 수양하고 학문에 전념하고자 심었다 하여 학목(學木)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제가 박신에 주목한 것은 강릉기생 홍장과의 사랑 이야기인 홍장설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한 박신이 기생 홍장과 사랑에 빠지자 강릉부사 조운홀이 뱃놀이를 가자고 권해 친구 박신을 안개가 자욱한 경포호로 유인합니다. 죽은 줄로 알고 있는 홍장이 선녀처럼 꾸미고 나타나자 크게 놀란 박신이 곧 조운홀의 장난임을 알게 되자 홍장과 기쁜 마음으로 재회를 했다는 것이 홍장설화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이 설화는 마음을 수양하고 학문에 전념하고자 향나무를 심었다는 박신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라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제가 강릉 경포대의 홍장암을 찾아 간 것은 15년 전의 일입니다.

 

  박신묘역에서 멀지 않은 가금리 언덕의 노거수 느티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어 갔습니다. 500년가량 된 이 나무 아래 벤치를 세워놓은 것은 여름철이면 이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이 넓고 시원해 더위를 피해 쉬어 가기에 알맞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거수 느티나무를 지나 만난 또 하나의 거목은 은행나무인데 수령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애기봉을 찾아가는 길에 들른 명소는 가금3리경로당 맞은편에 자리한 한재당(寒齋堂)입니다. 한재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모함을 받아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이목(李穆, 1471-1498)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이목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25세 되던 연산군 원년(14950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영안도(함경남도의 옛 이름) 평사를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입니다. 현존하는 사당은 1974년 이목의 후손들이 이곳에 다시 건립한 신사당으로 이목의 위패와 숙종43(1717)과 경종2(1722)에 추증한 교지가 함께 보관되어 있으며, 1848년에 건립된 구사당은 맞배지붕 목조 와가로 정면 3, 측면 2칸이며 일주문과 담장이 둘러 있었으나 현재는 담장만 남아있다고 안내판은 적고 있습니다.

 

  1525분 애기봉 전망대에 올라 조강을 조망했습니다. 평화의 길/평화누리길 2구간이 끝나는 애기봉 입구를 지나 애기봉생태공원입구의 사무소를 들른 것은 인터넷으로 예약한 입장권을 표로 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표를 초소에 제시하고 애기봉생태공원 안으로 들어서 1.5Km를 걸어가 애기봉 전시관에 도착했습니다. 아직은 잎이 돋지 않아 썰렁한 길을 올라 평화생태전시관에 다다랐습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해병대김포지구 전적비입니다. 제가 해병대에 친밀감이 느껴지는 것은 3년 전에 돌아가신 작은형님과 아들, 손자 3대가 모두 해병대가족이어서 그러한 것 같습니다.

 

  전적비를 둘러본 후 찾아간 곳은 평화생태전시관으로, 이곳에서 조강의 어제와 오늘을 영상으로 만나보았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조운선이 드나들었던 조강이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이 대치하는 국경선이 되어 어떤 선박도 운항되지 않습니다. 강가 길도 자유롭게 걸을 수 없어 이번에 제가 따라 걸은 조강의 길이는 약1 Km에 불과합니다.

 

  흔들다리를 건너 지그재그로 난 데크길을 지나 애기봉전망대에 도착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비명을 새긴 애기봉(愛妓峰) 기념비와 망배단, 그리고 DMZ철조망과 한국전쟁 탄피로 만든 9m 크기의 평화의 종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북한을 가장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섰습니다.

 

  전망대에 올라서 집중해 조망한 것은 조강의 물흐름입니다. 파주의 오두산 아래 임진강/한강 합류점에서 시작되는 조강은 한강의 끝점인 유도를 지나 강화도에 이르러 예성강을 받아들인 후 서해로 흘러가는데, 임진강과의 합류점에서 유도까지의 조강의 물 흐름이 모두 조망되어 조강을 따라 1Km 밖에 걷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김훈은 저서 자전거여행에서 조강의 풍경을 아래와 같이 담담하게 그렸습니다.

 

백중사리에 조강의 밀물은 산맥을 압박한다. 강 건너가 북한 땅 개풍군 조강마을이고 강 이쪽이 남한 땅 김포시 조강마을인데, 그 사이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가서 지금 조강은 무인지경이다. 노을은 바람과 밀물과 썰물이 이 인적 없는 강을 드나든다.”

 

  위 글을 담담하게만 읽을 수 없는 것은 조강의 승경(勝景)에 덧붙여진 서사(敍事)가 너무 슬퍼서였습니다. 한강이 끝나는 유도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애기봉평화생태공원입구로 향했습니다. 운양역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중간에 몇 번 쉬면서 남은 시간을 죽였습니다. 

 

  16시20분 애기봉평화생태공원입구에 도착해 서른세 번째 한강 따라 걷기를 끝마쳤습니다.  마침 강화쪽으로 가는 한 분이 1Km 거리의 애기봉입구 정류장까지 차를 태워 주어 고마웠습니다. 30분 가량 기다려 7번 버스를 타고 운양역으로 가서 전철로 갈아타 귀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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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조강은 강화와 함께 삼남 지역에서 한양과 개성을 오가는 주요 조운로였습니다. 김포 주변에 서해의 대명포구, 원모루, 갑곶나루와 조강의 강녕포, 조강포, 마근포, 한강의 전류포구, 감암나루, 섶골나루 등 총 19개의 포구와 나루가 있었던 것은 하루 세 번 걸러지는 조강의 물참에 따라 진상품과 여러 물목을 가득 실은 세곡선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한성판윤을 하느니 차라리 김포군수를 하는 게 낫다는 말이 돌고, 김포가 전국 군중에서 서열 2위를 기록했던 때가 모두 조선 후기의 일이었다고 평화생태전시관의 전시물은 일러주었습니다.

 

  오늘날의 조강은 조운로서 기능을 상실해 오로지 남과 북의 휴전선으로만 기능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강의 비극은 19506월의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조강 유역의 마을들은 북한군이 조강을 건너 침략해 와 바로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19537월의 정전협정에서 조강을 포함한 파주 만우리부터 강화 말도까지의 구역은 '한강하구 중립 수역'으로 지정되었으나, 이 일대가 사실상 DMZ와 같이 취급되고 민통선까지 생기면서, 조강을 거점으로 살던 많은 주민들이 집과 생활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조강은 잊혀 가는 강이 되어 안타까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잊혀 가는 조강과 동병상련하는 것은 조강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애기봉(愛妓峰)이 아닐까 합니다. 애기봉은 조강 기슭 한가운데 자리한 해발154m의 나지막한 산봉우리로, 원래 이름은 쑥갓머리산이었다고 합니다. 애기봉이 아기봉이 아니고 애기봉이어야 하는 것은 아래 전설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감사는 사랑하는 애기(愛妓)와 함께 건너편 조강 유역까지 쫒겨 내려왔다. 그런데 여기서 그만 평안감사는 적들에게 잡혀 북으로 올라가고 애기만 홀로 강을 건너오게 됐다. 이후 애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쑥갓머리봉에 올라 돌아오지 않는 감사를 간절히 기다렸다. 결국 병들어 죽게 된 애기는 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이 봉우리에 자신을 선채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 유주현(柳周鉉, 1921~1982)은 단편소설 임진강에서 천년을 한 가지로 흐르면서 두고 세월을 셈하는 것은 강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강이 셈한 세월에는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고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변화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애기봉의 전설이 오늘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조강이 애기의 삶을 지켜보고 셈을 해 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