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구간:싸리재-금대봉-매봉산-피재-건의령
*산행일자:2005. 9. 24일
*소재지 :태백시/삼척시/정선군
*산높이 :금대봉1,418미터/비단봉1,279미터/매봉산1,303미터
*산행코스:싸리재-금대봉-비단봉-매봉산-피재-새목이-건의령-둘밭입구
*산행시간:7시8분-14시50분(7시간42분)
*동행 :나홀로
이른 새벽 흩뿌린 가랑비도 여유로운 가을 한낮의 넉넉함에 자리를 내주고 비를 그친 하루였습니다. 두 주전 중재-봉화산-매요마을 구간을 끝으로 남하행진을 마치고 나서, 강원도 태백의 싸리재에서 북상을 시작한 어제의 산행은 모처럼 넉넉했습니다. 낮 2시20분에 대간 종주를 끝낼 만큼 시간도 넉넉했고, 건의령에서 하산 후 버스를 기다리는 저를 제천까지 태워준 대전에 산다는 젊은이들의 마음씀씀이도 넉넉했습니다. 새벽에 내린 가랑비로 바지를 다 적신 제게 아침을 열어 준 햇살을 맞는 희뿌연 안개에서 넉넉함을 보았고, 팔다 남은 배추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광활한 고랭지채소단지에서도 밭주인의 넉넉함을 느꼈습니다.
새벽 2시반 경 태백시에 도착하자 일기예보에 없던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이번 산행도 구질 맞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끽해야 3시간밖에 못 잘 것 같아 하루 밤 숙박비가 만이천원으로 아주 저렴한 여인숙을 이십 수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 들었습니다. 손으로 채널스위치를 돌리는 13인치 테레비가 놓여 있는 아주 작은 방에 요와 이불만 달랑 깔려 있고 함께 쓰는 공동세면장과 화장실이 마치 당시를 재현한 세트 같아 어렵게 산에 다니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꿈속에서 추억을 찾아 헤매다가 예정보다 한 시간 늦은 아침 6시에 일어나는 바람에 7시가 넘어서야 대간 종주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7시8분 일명 두문동재로도 불리는 해발1,268미터의 싸리재를 출발했습니다.
싸리재 옆으로 남한에서 가장 길다는 정암터널이 뚫린 후 옛길을 지나는 노선버스가 없어져 어쩔 수 없이 만이천원을 들여 태백시에서 이곳까지 택시로 옮겨야 했습니다. 싸리재에 다다르자 안개가 가득 찼고 바람이 매우 차 스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른 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10분여 걷다가 오른 쪽의 2번째 헬기장으로 붙어 금대봉으로 이어지는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4-5분을 좁다란 다른 길로 들어서 바지와 구두를 전 부 적신 후 널 다란 제 길로 들어서 십수 분을 오르는 동안 간간이 아침햇살이 안개를 뚫고 숲 속을 내 비추었습니다.
7시37분 해발1,418미터의 금대봉을 올랐습니다.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봉으로 잘 알려진 금대봉은 안개만 가셨다면 전망이 일품이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양강발원봉을 지키는 돌무덤과 초소, 그리고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덕분에 제대로 자라고 곱게 핀 쑥부쟁이, 벌개미취와 투구꽃 등의 야생화들, 이들과 벗하는 바람과 안개가 시적분위기를 자아내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금대봉 출발 12분 후에 첫 번째 갈림길을 지났고 25분 후에 두 번째 갈림길을 지났는데 이 갈림길 모두가 동으로는 용연동굴, 서로는 검룡소로 내려서는 분기점이었습니다. 16분 후 1233봉에 올라서서 태백418의 삼각점을 2004년에 복구했다는 안내문을 보자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 높은 곳에 설치된 삼각점을 훼손했을 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8시40분에 쑤아밭령에 다다랐습니다.
싸리재에서 4.0키로를 걸어와 피재까지 4.9키로 남아 있는 쑤아밭령은 비좁은 다른 고개 마루와는 달리 평원처럼 널찍했고 큰 키의 참나무와 낙엽송이 마루 금 좌우로 알맞게 들어서 있어 넉넉함을 느꼈습니다. 재작년 여름 백두산의 서파능선을 종주하고자 관통한 장백임해에 빽빽이 들어선 자작나무 숲에서 질서를 감지해 냈지만, 어제 오른 쑤아밭령의 듬성듬성한 숲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9시8분 비단봉 조금 못 미친 전망봉에서 뒤돌아보자 싸리재 너머 은대봉에서 금대봉을 거쳐 비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 실루엣이 한 눈에 잡혔습니다. 쑤아밭령에서 전망봉에 오르는 동안 얼마고 아침햇살이 안개를 뚫고 숲 속을 비추어 늦잠 자는 새들을 깨우자 여기저기서 그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와 비로소 대간 길이 활기를 되찾은 듯 했습니다.
방안에 가득 찬 먼지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의 진로가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어제는 산자락에 드리운 옅은 안개를 뚫고 숲 속을 비치는 햇빛의 행로를 다시 보았는데 가히 일품이었습니다. 산 속의 안개입자가 빛을 산란시켜 자아내는 빛의 행로가 맑은 날에는 결코 볼 수 없는 자연현상으로 경이롭게 보였습니다. 빛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도움을 주는 이론은 입자설과 파동설이 있습니다. 텐마크의 과학자 닐 보아는 입자설과 파동설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고 보완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입자설과 파동설은 20세기에 들어서서 양자론으로 통합되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빛의 근원인 태양의 넉넉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가 여겨졌습니다.
비단봉을 우회해 얼마고 산내림을 계속하자 광활한 고랭지 채소밭이 펼쳐졌습니다.
9시22분에 만난 채소밭을 1시간 반 이상 드나들며 5번을 밭 한가운데로 관통했습니다. 개발과 보존의 갈등의 현장인 이 채소밭 단지가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 공사장처럼 국민적 관심을 불러 모으지 못하는 것은 대간꾼들이 천성산 터널공사를 목숨 걸고 막은 어느 여스님처럼 영특하거나 집요하지 못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개발과 보존을 갈등관계로만 보지 않고 이를 뛰어 넘어 상보적관계로 끌어올리는 대간꾼들의 지혜가 여스님을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대간 길을 개간해 채소를 부쳐 먹는 농민들과 대립하여 몇 날 몇 밤을 굶어가며 투쟁하는 대간 꾼은 아무도 없어도 농민은 더 이상 대간을 해치지 않고 해마다 채소를 지어먹고 대간 꾼은 오늘도 그 길을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싹쓸이 하듯이 채소밭에 한포기도 남기지 않고 모두 내다 파는 각박함에서 벗어나 꽤나 실하게 보이는 배추통을 얼마고 남겨 놓은 농심의 넉넉함이 대간꾼들의 여유로움과 만나 갈등이 풀리는 모습이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데 바쁜 환경단체의 투쟁적인 모습과 잘 대비된다는 생각입니다.
10시21분 일명 천의봉으로도 불리는 해발 1,303미터의 매봉산에서 떡을 들며 15분 가까이 쉬었습니다. 매봉산에 오르기 직전 태백시의 공무원 한분을 만나 2년 전 이곳에 세운 풍차에 관해 몇 마디 나누었습니다. 구름 속에 숨어 있던 5기의 풍차가 3번째를 지나자 높이가 48미터이고 날개의 길이가 5.2미터인 전신을 드러내 그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마침 2기의 풍차가 네델란드의 기술자가 수리를 하고 있어 멈추었는데도 나머지 풍차가 도는 소리만도 대단히 컸습니다. 풍차1대로 약 200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지만, 프랑스의 문화비평가 기소르망이 그의 저서 “진보와 그의 적들”에서 지적한대로 소음공해로 풍력발전이 결코 원자력발전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봉에서 피재로 내려서는 대간 길 중간 지점에서 낙동정맥이 갈려 다음의 정맥종주에 대비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두었습니다. 낙동정맥 분기점을 지나 시멘트 길로 내려서자 맞은편에 조림된 듯한 작은 자작나무 들이 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1시25분 해발 920미터의 피재로 내려섰습니다.
피재가 삼수령으로 불리는 까닭은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강 등 3강의 물이 이 고개마루에서 갈라져서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금대봉은 한강-낙동강의 양강발원봉으로, 검룡소는 한강발원지이고 황지연은 낙동강발원지로, 피재는 한강-낙동강-오십천강의 삼수분수령으로 알려져 있는데 금대봉에서 갈라진 물이 삼수령인 피재에서 다시 만나 갈라진다는 얘기인지, 또 금대봉에서 발원된 물이 땅속을 흐르다 검룡소와 황지연에서 치솟아 오른다는 것인지 제 머리로서는 풀 수가 없어 답답했습니다.
11시 49분 피재의 가게에서 라면을 사들고 나서 건의령으로 출발했습니다.
피재에서 건의령까지 대간 길은 대체로 경사가 완만하고 흙길이어서 걸을 만 했습니다. 노루메기에서 시멘트 길을 건너 다시 산속으로 들어서 얼마고 올라서자 비를 맞은 아름드리 적송이 제 색깔을 내 보기에 좋았습니다. 산 밑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이제껏 아무도 만나지 못한 산속의 정적을 깼습니다.
12시32분 945봉을 지났습니다.
945봉을 내려서 작은 늪지가 있는 십자안부에서 인사를 나눈 젊은 두 사람이 나중에 저를 제천까지 태워줘 빨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20분을 더 걸어 적송 숲을 지나 다다른 능선에서 5-6분을 쉬면서 뒤를 돌아다보자 오전에 지나온 풍차가 멀리 보였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숲 속에서 쉴 때에 더워서 힘들어했는데 어느새 가을에 접어들어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가 오랜 시간 쉬기에 훨씬 낫게 느껴졌습니다.
13시40분 960봉에 올라섰다 건의령을 향해 쉬지 않고 내달렸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가 함께하는 송백산악회와 얼마 전까지 살았던 과천시에 사는 어느 한분의 표지리봉이 걸려있어 반가웠지만, “남성수술전문병원”을 알리는 표지리봉은 이 깊은 산속에서 조차 상업광고문을 읽는 듯 해 곱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960봉에서 20여분을 내려와 가짜 건의령으로 알려진 잔디가 곱게 덮인 사거리공터에 피재는 5.5키로, 건의령은 0.5키로 남아 있다고 표지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14시20분 차 들이 충분히 다닐 수 있는 넓은 비포장도로의 고개마루인 건의령에서 7시간 남짓한 대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건의령 도착 10분전에 지난 전망바위에서 내려다 본 상사미동의 정경은 정감 가는 시골 풍경이었습니다. 피재에서 시작된 오십천 강이 이 마을을 지나고 이 강을 따라 길이 난 굽이 진 도로도 쭉 뻗은 고속도로보다 정이 갔습니다. 아침에 예정대로 5시에 기상했다면 구부시령까지 충분히 갈수 있었겠지만 출발이 한 시간 가량 늦어 해전에 구부시령까지 가기가 조금은 무리일 것 같았습니다. 마침 장모님 생신이라서 오후 3시전에 산행을 마치고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터라 주저하지 않고 이곳 건의령에서 종주산행을 마치기로 하자 모처럼 시간의 넉넉함을 맛 볼 수 있었습니다.
건의령 고개마루에서 20분을 쉬고 난후 서쪽으로 난 큰 길을 따라 상사미동으로 내려갔습니다. 도로에 내려서기 직전 도랑에서 몸을 씻느라 다시 10분가량 쉰 후 길 건너 둘밭 앞길 승강장에서 40분가량 버스를 기다리다 늪지에서 만난 두 젊은이의 호의로 태백을 거쳐 저녁 6시경 제천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목포의 한 대간 꾼과 저를 보고 차를 세워 태워준 대전의 두 젊은이에 깊은 감사의 뜻을 보냅니다.
새벽에 비가 내려 이번에도 우중산행으로 마음이 다급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는데 비가 더 이상 오지 않고 산행코스도 짧아 모처럼 여유롭고 넉넉한 산행을 즐겼습니다. 이 넉넉함이 속세로 환속해서도 계속되면 얼마나 좋겠는 가 상상해보며 산행기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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