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구간:마등령-황철봉-미시령
*산행일자:2005. 10. 16일
*소재지 :강원속초/인제
*산높이 :황철봉1,397미터
*산행코스:미시령-황철봉-저항령-마등령-오세암-백담사
*산행시간:2시13분-13시30분(11시간17분)
*동행 :송백산악회
어제는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귀경하면서 순조롭게 자리물림을 하는 자연의 섭리에 대해 저 나름대로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녘 산행 중 때마침 보름을 하루 앞둔 거의 꽉 찬 둥그런 달의 조촐한 달넘이에 뒤이어 속초 앞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화려한 해돋이를 지켜보며 밤과 낮의 소리 없는 자리바꿈을 읽었습니다. 요 몇 주 동안 많은 산객들의 발걸음을 설악으로 돌리게 한 가을단풍 또한 한 여름을 지배해온 초록의 클로로필이 가을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안토시아닌과 노랑색의 크산토필에 자리를 물려준 결과이기에 이 또한 때가 되면 물러서고 들어서는 계절의 적절한 변화 시기를 헤아릴 줄 아는 자연의 로고스 덕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산행을 끝내고 백담사에서 2시간 여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새치기를 시도하는 뭇 군상들을 지켜보며 들고 나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 이 아수라장의 세상은 자연과 분명하게 대비됨을 보았습니다.
잠실을 출발해 4시간 여 밤을 달린 버스가 새벽 2시10분 경 해발 767미터의 미시령에 도착했습니다. 작년 9월 덕유산 삿갓재에서 헤아렸던 초롱초롱한 별들의 무리를 어제 새벽 다시 만났으며 그중 매일 한번씩 북극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북두칠성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8백년 전 별나라 소식을 전해준 북극성 별빛이 어제는 북새통의 이 세상소식을 듬뿍 실고 미시령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도 마등령-황철봉-미시령 구간을 역순으로 종주하고자 서둘러 미시령을 떠났습니다.
새벽2시13분 밤을 뚫으며 산 오름을 시작했습니다.
버스4대의 대 군단이 일렬로 대오를 이루는데 7-8분이 걸려 2시21분에야 철조망을 넘어 본격적인 산행 길에 들어섰습니다. 4-5분 후 정상적인 등로에 합류한 후 반시간 남짓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재작년 연초부터 금년 말까지 만3년 간 자연휴식년에 들어 간 미시령-마등령 전 구간을 관계당국에서 입산을 금하고 있어 별 수 없이 대간꾼들은 밤을 도와 정식 등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의 개구멍바지를 통과해 대간 길을 이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2시57분 1,000미터 대의 무명봉에 세워진 삼각점을 확인했습니다.
미시령에서 무명봉에 이르기 까지 달과 별들이 어우러져 헤드랜턴의 길 밝힘을 도와주었습니다. 앞사람을 놓칠세라 쉬지 않고 올라서인지 오른 쪽의 창암계곡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도 등의 땀을 식혀주지 못했고 아직 너덜지대를 만나지 않아 편안한 산 오름이었는데도 발을 잘못 내딛어 사고라도 날까보아 신경을 쓰느라 모처럼 만에 밤하늘에 펼쳐진 별 잔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2000년 8월 일본의 고산 다테야마를 올랐을 때 바로 밑에 자리 잡은 해발 2,400미터대의 초원 무로도를 “별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컨셉으로 관광객을 부르는 광고전단을 보았습니다. 고산에서 하늘을 수놓는 깨끗하고 산뜻한 수많은 별들 중 자기별을 찾아보는 재미도 솔깃할 터인데 어제는 빽빽한 일정으로 그리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드디어 너덜길이 시작됐습니다.
기계적 풍화작용의 결과로 산사면 방향으로 흘러간 돌덩어리 암괴가 무수히 널리 퍼진 너덜지대를 이루는 암괴류(block stream)는 3-4백만 년 전인 신생대의 고온다습한 간빙기에 화강암질의 암류가 심층풍화작용을 활발히 받은 결과 다량의 핵석이 만들어졌고, 이 핵석이 후빙기로 접어들면서 많은 비를 내린 기후변화로 인해 하부로 이동되어 만들어졌다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너덜지대 6개를 지나야 구간종주를 마칠 수 있다하니 이번 대간 종주는 너덜길을 얼마나 안전하게 지나느냐가 관건일 듯싶었습니다. 지난여름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여성 산객 한분이 안개가 가득한 이 너덜지대를 지나면서 환상산행에 빠져 엄청 고생을 했다는 산행기를 보고 비가 오거나 어두워지면 절대로 너덜지대를 지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제는 개구멍바지를 들키지 않고 통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밤 시간을 택했습니다.
너덜바위에 부딪혀 깨지고 까진 산객들이 부지기수라서 저라고 성한 몸으로 온전하게 통과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용케도 구멍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지만 발을 제대로 옮기는 데만 신경을 쓰다가 머리로 바위를 치받아 그 충격으로 이빨이 부러지는지 알았습니다.
4시3분 급경사의 너덜길을 올라 다다른 1318봉에서 짐을 내려놓고 이제껏 발끝만 쳐다보았던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들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오염된 도시에서 쫓겨나 산위에 자리 잡은 별들을 찾아와 눈길을 준 제게 별들이 함박꽃 웃음으로 답례하는 듯했습니다. 드세진 바람으로 등골이 써늘해져 이내 짐을 챙겨 황철봉으로 향했습니다. 너덜지대를 벗어나 숲길을 지나며 나뭇잎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길을 밝혀주는 꽉 차 보이는 달이 고맙고 다정다감하게 느껴졌습니다.
4시47분 해발 1,391미터의 고봉이 황철봉 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1318봉에서 황철봉까지는 경사가 완만해 밤길이라도 걸을 만 했습니다. 낮 시간의 산행이라면 산행기를 제대로 쓰기 위해 산세와 생물들의 몸짓을 묘사할 수 있는 의태어를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어제처럼 밤을 도와 산행을 할 때에는 조용한 밤에 나는 다양한 소리를 제대로 전할 수 있도록 의성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철봉에서 전망바위로 옮기면서 처음으로 달넘이를 보았습니다. 저녁시간 해넘이처럼 그 주위를 온통 붉게 물들이지는 못했지만 해맑은 달이 제 몸 하나는 분명하게 붉게 물들여 장엄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5시2분 삼각점이 설치된 전망바위에 올랐다 바로 우측으로 하산하며 너덜지대로 들어선 것이 이번 산행 최대의 알바를 빚은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거의 똑바로 내려서면 저항령에 내려서게 되는데 너덜지대에서 집단으로 길을 잃어 원 위치해 제 길로 들어서느라 한참을 헤맸습니다. 블루베리님과 후미를 이루어 천천히 저항령으로 내려서느라 일행들과 한참 멀어진 것 같았습니다.
6시17분 너덜길이 시작되는 3부 능선쯤에서 아침을 들며 해돋이를 보았습니다.
속초 앞바다를 붉게 물들인 후 바다를 차고 올라서는 해돋이는 시간반전 보았던 달넘이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려하고 장대해 마치 이임식과 취임식을 차이를 보는 듯 했습니다. 달넘이와 해돋이를 동시에 본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습니다. 보름 즈음의 날이 좋은 날 무박으로 동해안의 고산을 산행해야 얻을 수 있는 행운이었기에 이 행운을 잡은 기쁨을 후미길동무인 블루님과 함께 했습니다. 다시 고바위의 너덜 길을 오르는 고행이 반시간 가량 이어졌습니다. 오늘의 길손들을 맞고자 수백만 년 전부터 갈고 닦아온 너덜 길의 바위들에 힘들더라도 따뜻한 눈길을 주어 그 노고에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 7시2분 반시간가량 너덜 길을 올라 다다른 전망처에서 내려다 본 저항령계곡에는 예의 이 시간에 쉽게 볼 수 있는 운무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아 가을 산속의 현란한 아침 정경을 마음껏 탐닉했습니다. 1250봉의 거대한 암봉을 오른쪽으로 옆 질러 다시 능선에 올라선 다음 아침을 들고 있는 산행대장 한분과 일행 몇 분들을 앞질러 후미를 벗어났습니다.
8시43분 먼발치로 울산바위가 눈에 잡히는 전망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마등령 전위봉인 1327봉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1327봉 직전의 너덜지대까지는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지만 비교적 무난한 대간 길이어서 산행 중 블루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능선에서 단풍들을 바짝 다가서서 관찰하면 벌써 칙칙해져 실망하게 됩니다. 건너편의 산들은 단풍이 아름답게 들었는데 지금 걷고 있는 이 산의 단풍이 그리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얼마고 떨어져서 관조하는 여유가 있어야 세상사가 즐거울 수 있다는데 뜻을 같이 했습니다. 나무보다는 숲이, 또 산봉우리들을 모두 잇는 산줄기들의 실루엣이 언제 보아도 믿음직스럽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관찰의 눈이 아닌 관조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눈의 여유가 공백을 만들고 이 공백을 채우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 할 일임을 산행 중 대화를 통해 배웠습니다.
9시22분 1327봉에 오르느라 마지막 너덜 길을 올랐습니다.
이 너덜지대는 이제껏 밟아 온 것보다 바위들이 잔 것으로 보아 더 오랜 세월 갈고 닦여졌다 생각하니 더 깊은 정이 느껴졌습니다. 1327봉에 오르자 설악의 험난함을 상징하는 공룡능선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뒤를 돌아보며 지금까지 밟아 온 황철봉에서 여기 1327봉까지 연봉들을 이어보자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다양함이 느껴졌습니다.
9시33분 설악동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의 마등령에 도착, 도상거리 10.7키로의 마등령-미시령 구간의 대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공룡능선과 설악골의 비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마등령에서 오세암까지 하산로는 내리받이 길이었습니다.
고도를 낮출수록 막 들기 시작한 단풍이 한층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조용히 생각을 키우며 오르내렸을 한적한 이 길이 어제는 단풍세레머니를 즐기고자 찾은 산객들로 붐볐습니다. 남쪽 끝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귀때기청봉에서 대청까지의 서북주능이 오르기는 힘들어도 보기에는 아주 젊잖아 보였습니다.
10시40분 다섯 살 난 신동이 성불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오세암에서 일행 몇 분들과 함께 떡과 과일을 들어 요기를 했습니다. 여러 채의 건물이 들어선 오세암은 결혼 한해 전에 함께 찾은 29년 전의 고즈넉한 산사가 아니었기에 그 때처럼 집사람이 살아서 되돌아온다 해도 이 암자에서 손을 잡고 영원한 사랑을 되 뇌이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오세암만 세속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12시20분에 지난 영시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암자의 세속화가 이러할 진데 백담사라고 옛 그대로일 수 없음이 자명할 것이기에 더 이상 집사람의 자취를 찾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3시30분 백담사에 도착해 11시간 남짓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2시간 여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이 든 분들이 자행하는 부끄러운 짓거리를 보면서 아직도 학교에서 공중도덕심을 높이기 위한 교육이 제대로 행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내려선 내설악에는 이 가을의 마지막 제전인 단풍이 무르익기 시작했습니다.
나뭇가지 가지마다 힘들었던 여름을 담아내느라 피멍이 들은 단풍잎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색은 당연 붉은 색입니다. 모처럼 오랜 시간 산행을 하느라 고생한 분들에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 물어오며 중년 들어 간장이 저려오는 아픔이어든 가을날 울음 빛 단풍에 젖어들라고 노래한 시인 박재삼 님의 시선 “산에서”를 올려드리며 너덜 길의 산행기를 맺고자 합니다.
산에서
그 곡절 많은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
젊어 한창 때
그냥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기쁨이어든
여름날 헐떡이는 녹음에 묻혀들고
연중들어 간장이 저려오는 아픔이어든
가을날 울음빛 단풍에 젖어들거라.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속에
아른히 어린 우리 한 평생
그가 다스리는 시냇물도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시려오느니
사랑을 기쁘다고만 할 것이냐
아니면 아프다고만 할 것이냐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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