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종주기 2
*정맥구간:탄치재-쫓비산-외회갈림길 안부
*산행일자:2007. 5. 4일
*소재지 :전남 광양
*산높이 :쫓비산537미터/갈미봉520미터/불암산431미터
*산행코스:탄치재-불암산-토끼재-쫓비산-갈미봉-외회갈림길안부
-회두마을 버스회차장
*산행시간:6시45분-13시7분(6시간22분)
*동행 :나홀로
호남정맥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물을 받아 커다란 물줄기를 이룬 섬진강이 동편과 서편으로 가른 것은 망국적인 지역정서가 아니고 소리꾼들이 목청 높여 부르는 판소리입니다. 아직도 판소리 여섯 마당 중 어느 하나도 끝까지 들어보지 못한 제가 동리 신재효의 판소리사설을 모두 읽었다 해서 판소리의 문외한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판소리는 소리이지 결코 사설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산행기에서 판소리에 대해 한 마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호남정맥을 종주하느라 쫓비산을 오르내리는 중 오른 쪽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보고 이 강이 호남정맥과 힘을 합쳐 남도예술의 원형이랄 수 있는 판소리를 빚어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판소리는 17-8세기에 생겨서 19세기에 한 단계 발전한 당시로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었습니다. 아악이 양반들이 부르는 정가라면 타령은 창부나 서민들이 즐겨 부르는 잡가로 즐기는 음악도 신분에 따라 달랐는데, 판소리만은 위로는 임금에서 아래로는 천민까지 모두가 즐겼던 당대의 대표적인 대중음악이었습니다.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가 한 조가 되어 잔칫집마당이나 공터, 대청이나 사랑방 등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판을 벌이는 열린 음악으로 경기도 일대와 충청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는데 가장 성행한 곳은 단연 전라도였습니다. 전라도 땅 고창에서 태어나 동리정사에서 열두 마당으로 된 잡다한 사설을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박타령, 적벽가 및 변강쇠가의 여섯 마당으로 집대성하고 판소리꾼을 양성하는데 일생을 바친 동리 신재효의 공이 지대했음은 물론입니다. 전라도의 판소리는 1860년대에 들어서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의 산악지역에는 빠르고 웅장하면서도 거친 동편제가, 서쪽의 평야지역에는 느리고 애잔하면서도 기교를 부리는 서편제가 서로 경쟁적으로 발전했으니 이는 전라도 땅을 남도예술의 본향으로 만든 호남정맥과 섬진강이 있어 가능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영화를 국제무대에 널리 알려 존경받는 영화감독 임권택 님이 1990년대의 서편제에 이어 판소리 소리꾼의 애환을 담은 “천년학”을 그의 100번째 작품으로 올린 것도 관객들이 어깨를 으쓱이며 추임새를 넣을 수 있는 판소리가 이 나라 민초들에 진정한 우리의 고전음악으로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이 부분 많은 내용을 이이화님의 “한국사이야기”에서 따왔습니다)
광양의 한 찜질 방에서 숙면을 취해 온몸이 개운했습니다.
전날 밤 기차에서 한잠도 못자서인지 조용하지 않은 찜질 방에서도 등을 눕히자마자 잠이 들어 5시간 넘게 푹 잤습니다.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6시10분에 하동행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기사분의 배려로 탄치재 고개 마루에서 하차했습니다.
아침 6시45분 탄치재에서 왼쪽으로 난 넓은 흙길로 들어서 불암산으로 향했습니다.
텅 빈 가건물이 세워져 있는 과수원을 지나 울타리로 쳐놓은 플라스틱 발을 들고 그 밑으로 통과했습니다. 곧 이어 당도한 능선 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얼마고 걸어 오르자 광양터미널의 자판기에서 빼 마신 커피가 문제였는지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해 이른 아침부터 재잘대는 새들의 노래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몇 기의 묘지를 지나 다다른 320능선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봉우리 몇 개를 더 넘자 억새풀 길 끝의 불암산이 바로 눈앞에 다가섰고 뒤돌아 본 국사봉 길도 날씨가 쾌청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7시43분 해발431미터의 불암산 정수리에 섰습니다.
한참 아래로 내려가서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아 속을 비운 후 다시 정상에 서자 비로소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불암산이 최고의 전망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쫓비산 산줄기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수어저수지가 그리고 오른 쪽으로는 전날 다녀온 하동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으며, 바로 그 앞에 하동과 광양을 가르는 섬진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탄치재 동쪽에 사는 광양의 주민들은 아직도 강 건너 하동으로 장을 보러 간다는 기사분의 얘기가 참이라면 영호남의 주민들을 정서적으로 갈라놓은 것은 섬진강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기왕에 시골 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 소견 한 꼭지를 남기고자 합니다. 광양을 출발한 하동행 첫 버스가 닷새 만에 장이서는 옥곡을 경유하는데도 차안이 거의 텅 비어 이상하다 했습니다. 이제는 시골 길에서 장보러 버스를 타는 아낙네들을 거의 없다며 이러다가는 우리 고유의 닷새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는 기사분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전통적인 시골의 닷새 장은 물물교환의 장이자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정보교환의 장으로 큰 역할을 해왔는데 물물교환의 기능은 인근 슈퍼마켓이 해주고 정보교환의 기능은 상당부분 인터넷이 맡아주어 굳이 장을 보러갈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떤 문물과 제도이든 모두가 시대적 소산이기에 점점 자리붙일 데가 마땅찮은 닷새 장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한다고 고집할 뜻은 없지만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만나 값을 흥정하고 또 장돌뱅이들이 실어 나르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며 나누었던 세상 살아가는 풋풋한 정마저 같이 보내야한다 생각하니 아쉽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8시45분 왕복2차선도로가 지나는 토끼재에 내려섰습니다.
대나무 깃봉 옆에 삼각점이 세워진 불암산 정상에서 18분을 머무르는 동안 산 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골바람 및 계속해서 재잘대는 새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최근 몇 년간 혼자서 산을 다니다보니 저도 어느새 산식구가 거의 다 되었다는 착각이 들곤 합니다. 혼자서 대간이나 정맥을 종주하는데 가장 큰 적은 두려움과 외로움입니다. 대간 길 반 정도와 5개 정맥 길을 혼자서 종주해왔지만 아직도 산짐승을 만날 까 두렵고 하루 종일 누구하나 말 건넬 사람을 만나지 못해 이러다가 실어증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의 특효약은 산 식구들과의 한 통속이 되어 그들과 묵언의 대화를 주고받는 것인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산식구들과 대화를 이어가려면 그들의 속성을 제대로 알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하기에 말입니다. 산 속에 사는 동식물과 바위와 흙 등 광물은 물론 바람과 구름도 모두가 산식구이기에 이들 모두에 가슴을 열고 사랑하자고 마음먹고 나서도 갑자기 나타난 뱀에 질겁하고 방금 전 멧돼지가 분탕질한 흔적에 섬뜩해 하는 저를 보고 아직도 멀었다고 제 스스로 실소하곤 합니다. 불암산에서 토끼재로 내려서는 길은 편안했습니다. 키를 넘는 철쭉나무 숲을 지나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올 들어 처음 만난 둥굴레 꽃도 반가웠습니다. 한참을 내려와 왼쪽아래가 개활지인 능선 길에 다다르자 출입하면 고발하겠다는 어느 산주의 경고판이 서있어 살벌한 느낌이 들었지만 왼쪽 아래로 수어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와 전망만은 빼어났습니다. 채석장 공터를 가로 질러 내려선 토끼재 차도를 건너 컨테이너 박스 옆으로 난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10시22분 해발536미터의 쫓비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토끼재에서 380봉에 이르는 능선길이 가팔랐습니다. 길섶의 소나무들을 적당히 간벌해 골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으나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대부분 죽어있어 푸른 잎이 돋아나지 않았고 능선 길 오른 쪽에 쳐놓은 철조망도 녹슨 지 오래되어 전체적으로 산속이 우중충했습니다. 쫓비산에 오르는 능선 길은 단계적으로 고도가 높아져 380봉을 출발해 소나무숲길과 측백나무가 자라는 곳을 지나 460봉에 올랐고 오른 쪽으로 내려갔다 장송이 숲을 이룬 완만한 오름 길을 따라 걸어 490봉에 도착했습니다. 490봉의 능선분기점에서 왼쪽 길로 내려가 철쭉꽃이 활짝 핀 능선 길을 걸어 쫓비산에 오르자 올 들어 처음으로 “홀딱벗고”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는 길에 고개를 바짝 든 흑갈색의 새끼 뱀도 만나보았으니 이 정도면 이번 산행으로 5월의 산 식구들과는 모두 다 인사를 나눈 것 같습니다. 산 이름을 써 놓은 대삼각점이 맨 흙의 공터 한가운데 서있는 쫓비산 정상은 나뭇잎에 시야가 가려 이 산 동사면의 산자락에 들어선 섬진마을의 매화나무를 한 그루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해마다 3월이면 많은 손님들이 이 나라 최대의 매화꽃 축제가 열리는 이 마을을 찾는다는데, 이 때 손님들의 눈길을 끄는 또 하나는 마을 앞을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으로 쪽 빛나는 푸른 강물과 강 건너 백사장이 일품이라 합니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얼마고 진행하다가 너럭바위에서 잠시 쉬며 오른 쪽 아래의 섬진강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과연 섬진강의 푸른 물결과 백사장이 일품이었고 그래서 쫓비산의 쉽지 않은 산 이름이 바로 아래 쪽 빛나는 섬진강에 드리워진 봉우리가 쪽빛산이라는 데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그럴 듯하게 들렸습니다.
12시02분 해발 520미터의 갈미봉에 다다랐습니다.
섬진강을 조망하느라 잠시 쉰 너럭바위에서 갈미봉에 이르는 길은 곳곳에 바위무더기 들이 있었고 내려서는 안부도 깊었으며 오름길도 급한데다 가파르게 내려서는 바위 길도 있어 능선 길이 단조롭지 않았고 간간히 철쭉꽃도 피어 걸을 만 했습니다. 왼쪽 멀리로 나뭇잎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백운산 정상이 통째로 보이는 바위에 올라 정상봉 전신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꽤 굵은 참나무 줄기에 붙어서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는 이름모르는 가느다란 나무가 참나무껍질 속으로 파고든 것을 보고 이런 삶이 기생과 공생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쫓비산에서 갈미봉에 이르는 길은 갈미봉 바로 못 미쳐서 경사가 급해진 마지막 오름 길을 빼고는 그리 힘들지 않아 한 시간여 오붓한 산행을 즐겼습니다. 신록의 싱그러움과 골바람의 살가움, 재잘대는 새소리에 봄꽃들이 불러들인 색색의 여러 나비들의 나팔거림, 그리고 나무그늘 속에 쉼터를 마련해 준 너럭바위들과 같이하는 능선 길 한 시간이 모처럼 5월의 산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아침부터 서둘렀고 이렇다하게 길 찾기가 까다로운 데도 없어 생각보다 산행속도가 빨라졌습니다. 혹시라도 13시40분에 회두마을을 출발하는 버스를 타지 못할까하는 걱정은 사라졌고 시간이 넉넉해 갈미봉에 올라서 사과를 까먹으며 모처럼 충분히 쉬었습니다.
12시37분 왼쪽 아래 외회로 내려서는 갈림길인 십자안부에 내려섰습니다.
갈미봉에서 급경사 길을 내려가 고도가 3백m대로 낮아지자 능선길이 비교적 평평했습니다. 평평한 능선 길을 따라 걷다가 잠시 걸어올라 390봉을 넘어 십자안부에 도착해 2번째 구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안부에서 정맥 길을 벗어나 외회로 내려서는 길은 사람들이 흔하게 다니는 길이 아니어서 낙엽이 소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13시7분 회두마을 버스회차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십자안부에서 십 수분을 걸어 내려가 경사가 급한 과수원 밭을 지났고 이내 된비알의 시멘트 길로 내려섰습니다. 주인으로부터 길이 아닌 데를 다닌다고 싫은 소리를 들으며 민박집 앞마당을 지나 지계교 다리를 건너자 서울대학교 남부학술림의 안내판이 바로 앞에 보여 반가웠습니다. 회두마을 이정표가 세워진 합수점에서 왼쪽 계곡으로 내려가 몸을 닦고 나서 버스에 올라 정확히 13시40분에 회두마을을 떴습니다. 수어저수지의 물가를 따라 낸 찻길은 구비진 전형적인 시골 길이었습니다. 이 길에 인접한 야산의 나무들이 대개가 밤나무와 매화나무라고 기사분이 말씀해 주어, 이제껏 산길을 걸으며 보았던 초록색의 작은 열매가 바로 매실이었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나선 호남정맥 종주길이어서 산행계획을 느슨하게 잡아 한 낮에 일찌감치 예정된 하루산행을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첫날은 코스를 길게 잡고 다음날은 좀 짧게 잡아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늦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다행히 저의 산행속도가 조선일보의 책자에 나온 시간과 거의 비슷하고 이 책자를 발로 쓴 탐사 팀도 첫날은 길게 그리고 끝 날은 짧게 코스를 잡았기에 교통편만 새로 확인해서 문제가 없다면 이 책의 산행기록을 많이 따를 뜻입니다.
제게는 호남정맥 종주길이 새로운 도전입니다.
그러기에 종주 길에 들어서기 전에는 가슴이 뛰고 종주산행을 끝내고 나면 할 이야기가 많아지나 봅니다. 가슴 뛰는 열정으로 열심히 걷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산행기에 담을 것입니다. 30여년 전에 사 읽고 처박아 두었던 신재효의 판소리사설집을 다시 찾아 꺼낸 것도 호남정맥 종주기에 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입니다. 호남정맥이야 백년이 지난 들 어디 가겠습니까만 이 산줄기가 만든 어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시골의 닷새 장처럼 언제고 사라질 수 있기에 이 정맥을 종주하는 동안만이라도 열심히 듣고 전하고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이러한 기록들이 저의 실존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 확신하기에 다음 구간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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