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구간:한재-도솔봉-미사치
*산행일자:2007. 6. 7일
*소재지 :전남 광양/구례/순천
*산높이 :따리봉1,127m/도솔봉1,123m
*산행코스:논실-한재-따리봉-도솔봉-형제봉-월출봉-깃대봉
-미사치-심원마을
*산행시간:6시50분-16시10분(총9시간20분/정맥구간7시간35분)
*동행 :나홀로
그놈이 내는 소리는 쩌렁쩌렁 산을 울렸습니다.
누구라도 처음 듣는다면 겁먹기에 충분한 포효소리에 전혀 겁먹지 않고 소리로 응답한 두 생명체가 있었으니 하나는 이름모르는 새였고 또 하나는 저였습니다. 산속에서 몸을 숨기고 으르렁대는 그놈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해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포효하는 소리만으로도 이 산을 휘젓고 다니는 맹수임에 틀림없겠다 싶었습니다. 종을 달리하는 두 동물들이 어떤 사연으로 이른 아침부터 서로 울음소리를 나누고 있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 산 속을 지나 호남정맥을 종주해야겠기에 그 놈을 소리로 제압하고자 있는 힘을 다해 같은 박자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이 때 제가 질러대는 소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고 동물의 울부짖음이었기에 그 놈과 경쟁이 가능했다는 생각입니다. 목소리가 크기로는 누구한테도 빠지지 않기에 그놈과의 괴성질러대기 싸움은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는 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괴성지르기 7합으로 제가 이겼다고 판단한 것은 더 이상 포효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였습니다. 게임을 끝내고 생각해보니 그놈은 틀림없이 이 산 속에 천적이 없는 최고 강자 멧돼지였습니다. 2004년 9월 대간 종주 차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덕유산구간을 지날 때였습니다. 어떤 짐승이 큰 소리를 내어 저의 접근을 막았는데 소리의 크기로 미루어 멧돼지였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다리야 날 살려라하고 능선 길을 버리고 한참 밑으로 뛰어 내려가 우회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습니다. 그 후 약 3년 동안 저 혼자서 종주산행을 꽤 많이 한 터라 언제고 멧돼지와의 조우를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저 나름대로 담을 키우고자 애써왔습니다. 멧돼지가 운다고 종주산행을 포기하고 하산한다면 어느 명년에 9정맥 종주를 모두 마칠 수 있으랴 싶어 이번에는 소리는 소리로 겨뤄보자는 생각에서 큰 소리를 냈는데 작전이 주효했던지 그놈이 제가 가는 길에 나타나지 않았고 더 이상 괴성도 질러대지 않았습니다. 제가 소리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되자 얌전히 길을 내준 그 짐승에 이제껏 그놈이라고 부른 점이 미안했습니다. 어디서든 만나면 우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앞으로는 서로 눈인사라도 나누며 잘 지내볼 것을 제의하고자 합니다.
아침6시50분 논실마을을 출발했습니다.
광양의 베스파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아침6시20분경 인근 정류장에서 시내버스21-3번을 탔습니다. 30분 가까이 시골 길을 달려 한재에 이르는 끝 동네 논실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한재에서 걸어 내려온 길을 이번에는 혼자서 한재를 향해 올라가면서 혼자 걷는 오름 길이 둘이 걷는 내림 길보다 훨씬 힘이 들음을 느꼈습니다. 아침햇살에 해말간 모습을 보여주는 찔레꽃들이 저녁햇살을 받으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댄 친구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한재에 거의 다 다다라 부글대는 뱃속을 비우고자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길 건너 산속에서 멧돼지(?)가 포효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산을 울려 겁이 덜컹 났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떤 새의 울음소리에 화답하듯 소리를 내어 조금은 안심이 됐습니다. 저 정도의 소리라면 나도 한번 질러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다면 소리로 한번 제압해보자는 생각이 동했습니다. 멧돼지는 생각지 못한 저의 큰 소리에 꼬리를 내렸는데 새는 아랑곳 않고 울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침7시50분 한재를 출발해 정맥종주를 이어갔습니다.
한재에 올라 10분을 쉬면서 그새 멧돼지가 사라지기를 빌었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따리봉으로 오르는 숲길이 음침하거나 스산하지 않았고 이 길을 지나자 이제는 멧돼지를 만날 만한 길은 벗어났다고 생각됐습니다. 고바위 길을 올라 키가 작은 산죽 길을 지났고 다시 된비알 길을 치켜 올라 한 봉우리를 만나 이제는 따리봉에 다 올라왔다 했는데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난 비교적 밋밋한 능선 길을 따라 한참을 더 걸었습니다. 8시33분에 정상석이 세워진 해발1,127m의 따리봉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고봉인 따리봉은 훌륭한 전망지여서 전날 걸은 백운산구간의 종주길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북쪽방향으로 자리한 지리산의 연봉들이 너무 흐릿하게 보여 답답하고 아쉬웠습니다. 왼쪽 논실마을로 내려가는 계곡은 상당히 깊어보였고 정면으로 보이는 도솔봉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멈춰선 듯한 따리봉이 마냥 평화롭다고 생각된 것은 늦잠자다 막 깨어나 기지개를 펴는 새들과 이 들을 잠에서 깨운 바람이 내는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그리 따갑지 않은 아침햇살이 산속을 고루 비춰주어 모든 나무들이 광합성에 열중하느라 숨을 죽이고 있어서였습니다.
9시54분 해발1,123m의 도솔봉을 올랐습니다.
따리봉을 출발해 왼쪽으로 논실 길이 갈리는 삼거리 안부인 참재로 내려서기까지 철계단을 5번 내려왔습니다. 다른 정맥 길에도 빠지지 않고 걸려있는 강성원우유의 넓은 표지기가 눈에 띄어 반가웠습니다. 헬기장을 지나자 철쭉꽃이 보였지만 철이 지나서인지 꽃송이가 많지 않고 화사함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다시 안부삼거리를 지나서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숨 가쁘게 비알 길을 오르는 저를 잠시 불러 세운 것은 참나무 밑동에 자라고 있는 자그마한 노랑색의 버섯이었습니다. 이달 하순이나 내달 초쯤에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 버섯이 너무 일찍 선보여서인지 아직은 크기도 앙증맞게 작고 제 살색이 나지 않았습니다. 전망바위에서 급한 오름길은 끝났지만 햇빛을 바로 받는 길이 계속 되어 철계단을 밟아 헬기장 바로 옆의 도솔봉의 고스락에 올라서기 몇 분간은 힘들었습니다. 도솔봉에서 바라다본 백운산 줄기는 이제껏 보아온 모든 것을 총정리해 놓은 듯 압권이었고 억불봉이 백운산의 최동단의 초계봉이라면 정상에 인접한 신선대는 근위봉으로 보였습니다. 백운산-도솔봉의 주능선에서 남북으로 가지쳐나간 산줄기들이 만드는 골짜기들에 숨겨졌을 이 산의 전설을 찾아 그 내용을 알아본다면 사바세계인 저 골짜기로 내려서기 전에 성불하고자 도를 닦고 기다리는 도솔천이 바로 제가 서 있는 도솔봉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분 간 바지가랑이를 내리고 사타구니를 시원하게 한 다음 형제봉으로 향했습니다. 도솔봉에서 조금 내려서 평지 길을 걷다가 다시 올라 물푸레나무가 들어선 무명봉에 다다랐습니다. 바람이 시원했고 모처럼 낙엽이 쌓인 길을 걸어 발바닥이 좀 쉬었는데 한 동안 표지기가 나타나지 않아 혹시 길을 잘 못 든 것이 아닌 가 염려되었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지도를 꺼내 제 길임을 확인했지만 얼마 후 올라선 등주리봉에서 왼쪽으로 성불사로 갈리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목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11시31분 해발 861m의 암봉인 형제봉에 올라섰습니다.
형제봉을 1.0Km 남겨놓은 삼거리봉우리인 등주리봉에 오른 시각은 10시57분으로 도솔봉 출발 50분 후였습니다. 등주리봉에서 철계단을 밟고 내려가 안부인 새재에 다다르자 밑에서 불어올라오는 골바람이 제 전신을 휘돌고 지나가 엄청 시원했습니다. 새재에서 전망봉으로 오르는 길섶에 찔레꽃 몇 송이가 눈인사를 해왔습니다. 꽃이야 장미처럼 화사하지는 않아도 돋친 가시의 찌르는 위력은 장미를 뛰어넘기에 찔레로 불리는 것일 텐데 장사익의 노랫말에는 찔레꽃의 날카로움은 온데 간 데 없고 정감만 넘쳐흐르는 듯 했습니다. 전망봉에서 철계단에 내려섰다가 다시 철계단을 올라 형제봉에 다다르자 도솔봉이 앞을 가려 철계단을 따라 전해지는 백운산의 보살핌도 최서단의 초계봉인 형제봉에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리봉-도솔봉-형제봉의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을 카메라에 담고 나서 북서쪽에 위치한 월출봉을 향해 형제봉을 출발했습니다. 형제봉에서 내려서 서쪽으로 조금 옮기자 정상에 있어야 할 삼각점이 능선 길옆에서 보였습니다. 삼각점을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마사치 아래에 차를 주차시켰다는 마주 오는 젊은 산객 한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형제봉 출발 20분이 다 되어 844봉에 올라섰는데 이 봉우리에서 걷기 좋은 길은 끝났습니다.
13시5분 해발768m의 월출봉에 도착해 점심을 들었습니다.
호남정맥 종주 중 처음으로 풀 숲길을 만나 곳은 844봉을 지나서였습니다. 844봉에서 내려선 안부에 억새와 관목의 가지가 무성해 이들을 헤치고 나가면서 이미 여름이 시작됐음을 실감했습니다. 지난해 9월 한북금남정맥을 종주하며 음성을 지날 즈음 풀숲 길을 헤쳐 나가느라 된 고생을 한 기억이 생생해 호남정맥을 종주하면서도 그에 버금가는 풀 숲길을 만나리라 각오하고 있는데 이번에 만난 풀숲 길은 여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정도로 미미했습니다. 풀숲 길을 빠져 나와 월출봉에 이르기까지 능선 길은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고 바위 길도 지났으며 산 죽 길도 지났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진행했습니다. 어서 빨리 월출봉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쉬지 않고 내달려 지도에 적힌 대로 1시간20분이 다 되어서 월출봉 바로 아래 임도사거리에 내려섰고 그 4분 후에 월출봉에 올랐습니다. 날 맑은 밤에는 중천에 뜨는 보름달이야 볼 수 있겠지만 나무에 시야가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봉우리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표지감도 없는 월출봉에서 20분을 쉰 후 남쪽으로 방향을 확 틀어 깃대봉으로 내달렸습니다.
14시18분 해발858미터의 깃대봉에 올라섰습니다.
월출봉에서 내려가다가 임도를 두 번 가로질러 참나무들이 들어선 넓은 안부에 다다라서는 16시40분에 심원마을을 출발하는 버스를 놓칠까봐 있는 힘을 다해 내달렸습니다. 안부에서 후다닥 참호 2곳이 있는 720능선에 올라섰고 바람소리를 내며 편안한 능선 길을 빠르게 지났습니다. 833봉 바로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고바위 길을 단 번에 내달아 833봉에 올라서자 “아빠랑 나랑 마루금 잇기” 표지기가 눈을 끌었고 왼쪽으로 깃대봉이 보였습니다. 왼쪽으로 꺾어 아주 편안한 능선 길을 15분간 더 걸어 깃대봉에 다다랐습니다. 월출봉 출발 52분 만에 도착해 지도에 나와 있는 시간보다 18분을 단축했기에 버스시간 걱정은 이제 한 옆으로 제쳐 놓았습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스틸파이프 의자에는 다른 분이 앉아 있어 깃대봉에서 조금 내려가서 남아 있는 포도를 마저 먹으며 8분을 쉬었습니다. 3개면 경계판이 세워진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전망바위를 지나면서 깃대봉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15시24분 미사치에 내려서서 정맥 종주를 마쳤습니다.
전망바위에서 더 내려서 다다른 능선 길을 얼마고 걷자 “등산로 아님”의 간판을 만나 직진을 멈추고 오른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밑창이 얇은 여름 등산화를 신고 이틀 연속 걸었더니 발바닥이 아파 내달리기를 포기하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길은 넓었고 구릉을 몇 번 오르내리다 송전탑이 보이자 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송전탑과 헬기장을 차례로 지나 이번 종주구간의 끝 지점인 미사치고개로 내려섰습니다. 버스출발까지 시간이 넉넉해 나무의자에 앉아 15분가량 아무런 생각 없이 편안히 쉬었다가 심원마을로 내려갔습니다.
14시10분 심원마을 입구의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끝냈습니다.
미사치에서 왼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 황전터널 공사현장을 지났는데 미사치고개 밑으로 내는 터널이어서 동물이동통로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도룡뇽을 보존하기 위해 터널을 뚫는 것을 목숨 걸고 반대한 한 스님 때문에 공사가 지연되어 수많은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천성산 터널공사로부터 확인한 것은 정부가 줏대 없이 흔들리면 국민들이 고달파진다는 것입니다. 시민의 이름을 사칭한 개인이나 단체들에 그들의 잘못으로 발생한 비용을 어떤 방법으로든 부담토록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시민의 이름을 내걸고 반시민적인 일들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기에 세금을 내는 보통의 시민들도 두 눈을 부릅뜨고 진정성이 의심되는 시민단체의 비합리적인 소행을 계속 감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14시40분에 21-3번 버스를 타고 순천 역으로 가서 18시발 기차를 탔습니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멧돼지를 그놈이라 부른 것은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폭음을 내며 터널을 뚫는 사람들에도 욕을 전혀 하지 않는 멧돼지에 괴성을 좀 질렀기로서니 그놈으로 표현한 것은 제가 좀 과했다는 생각입니다. 일본의 물 연구가 에모토 마사루는 어떠한 마음으로 물을 대하느냐에 따라 물의 결정체의 모습이 변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생물인 물이 이럴진대 생명을 갖고 있는 멧돼지는 제가 어떤 마음을 갖고 대하는 가를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욕을 듣고도 좋게 대할 사람은 정말 많지 않습니다. 욕을 듣고도 좋게 대할 짐승이 과연 있을까 싶은 것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도 그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리싸움은 제가 이겼지만 마음 씀의 싸움에서는 아무래도 멧돼지에 진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러웠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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