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다.
학교 다니고 장가들고 애를 낳아 기른 곳도 아니다. 이 도시 출신으로는 서로 집을 오갈만한 친한 친구 한 명 없어 한창 싸다니기를 좋아했던 대학시절에도 들러보지 못했다. 처갓집도, 이 쪽 두 어르신의 고향도 모두 이 도시와는 전혀 소통이 없는 한수 이북이라서 결혼해서도 찾아 나설 일이 전혀 없었던 소읍이 밀양이다. 사범대학을 졸업해 한 5년은 경기도 일원의 중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군복무도 고향 파주에서 방위병으로 일했으며 학교를 떠나 한 회사로 옮기고 나서도 줄곧 서울 본사에서 근무한 터라 밀양과는 인연을 맺을만한 계기를 전연 잡지 못했기에 이제껏 이 소도시에 특별히 호기심을 가져 보거나 단 한 줄의 여행기를 써 본 일이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작은 도시 밀양은 내게는 특별히 정이 간다거나 아니면 다시는 발을 붙이지 않겠다거나 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그저 그런 도시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밀양과 단 한번이라도 옷깃을 스친 인연을 꼭 끄집어내야 한다면 10년 전 겨울 에 이 도시를 찾아와 하룻밤을 묵어간 일이다. 내가 마케팅 임원으로 일한 모 회사에서 여자배드민턴 팀의 단장을 겸직으로 맡았던 1997년 겨울 전지훈련 차 밀양으로 옮겨 1주일여 비지땀을 흘리는 선수들을 격려하고자 이 곳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고 간 것이다. 그때 우리 선수단이 이 도시를 찾은 것은 딱 하나 햇살 때문이었다. 한 겨울의 삭풍을 피해 따뜻한 햇살을 찾아 남쪽으로 향하다 머무른 곳이 바로 여기 밀양이다. 밀양은 둘러싸고 있는 바람막이 산들이 대체로 낮아 그늘을 만들지 않았고 높다란 빌딩도 없어 햇살이 내려앉는 것을 방해할 장애물이 하나도 없는 소도시다. 그러기에 마치 밀림에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듯이 거침없이 내려앉은 햇살이 밀양에 가득 차 햇살의 밀림지로 느껴지기도 했다. 배드민턴 명문교인 밀양고등학교가 이 도시에 있어 우리 선수들과 훈련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점도 감독이 이 도시를 전지훈련지로 선정하는데 한 몫 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기차에서 내려 난생 처음으로 이 도시에 발을 들일 때 느꼈던 따사로운 햇살이 이 도시를 감싸지 않았다면 아마도 더 밑으로 내려가 마산이나 창원 어느 곳에서 동계훈련을 했을 것이다. 그 후 10년간 나는 밀양 땅을 밟지 못했다. 얼마 후 그 회사를 그만 두었기에 배드민턴 선수단을 더 이상 맡을 일이 없었고, 또 내게 라나에무스꾸리의 테이프를 건네 준 밀양의 시인 한 분에게서 이 분의 시가 실린 이 도시 문학잡지를 딱 한 번 받아 본 후로는 연락이 끊겨 이 도시와 더 이상 연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러한 밀양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영화 “밀양” 덕분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는 데 걸림돌이 된 분은 이창동 감독이었다. 설경구가 열연한 박하사탕으로 처음 접하게 된 이 감독에 나 나름대로 따뜻한 마을을 가졌던 것은 그의 영화가 예술적으로 뛰어나다는 점 외에도 사범대학에서 국어를 전공하고 일선학교에 부임하여 국어선생으로 일한 독특한 그의 경력이 사범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과학교사로 5년을 근무했던 나와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 때 메가폰을 내려놓고 한 2년 문광부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그가 벌여놓은 좌편향적인 수많은 정책에 크게 실망해 그 후로는 그에게서 아예 등을 돌려버렸는데 그의 작품 “밀양”이 칸느영화제에 출품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서 그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되살아나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영화 밀양을 통해 밀양을 다시 한 번 만나보겠다는 내 욕심이 이창동감독과 부딪치면서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가 한나라의 장관으로서 통합과 조정의 본래 임무를 저버리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정권의 맨 앞에 서서 이 나라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그동안 열심히 일해 온 결과로 얼마간의 부를 쌓아오며 이 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분들에 서슬파란 증오의 칼날을 들이댔다고 생각하는 나였기에 그를 휴머니스트의 공적으로 생각해온 나로서는 아무리 작품이 훌륭하더라도 선뜻 그의 영화를 볼 생각이 내키지 않았다. 본선에 오르고 급기야는 전도연에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영화가 영화계의 톱뉴스로 자리하자 이 영화가 밀양을 어떻게 그렸을까 하는 궁금증을 주체할 수 없어 고민의 도가 점점 더해졌다. 결국 이 영화를 보러가자고 마음먹었고 곧 바로 생각해낸 것이 감독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작인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의 탄탄한 줄거리와 주연여배우 전도연의 절정에 오른 연기 덕이지 결코 이창동 감독의 역량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영화가 수상을 한 것은 여우주연상이지 감독상이 아니지 않는가 하면서 말이다.
지난 토요일 밀양을 보려고 집 근처 영화관을 들어서자 자리가 텅텅 비어 있어 놀랐다.
감독과 척을 진 나 같은 사람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이 영화를 보러 왔는데 어찌 이리도 객석이 텅 빌 수 있는가 싶어 분노와 허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먹고 살기가 힘들어 아무리 유명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명작이라도 경제적 여유가 없어 좌석이 텅 비었다면 “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전 미국대통령 클린턴의 캐취프레이즈를 외면하고 좌익사상을 전파하는 데 골몰했던 감독의 장관시절 잘못된 정책의 인과응보이기에 고소 맛이다 싶으면서도 잠시 하룻밤을 묵으며 쉬어간 햇살 가득한 밀양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한 여인을 많이 닮은 전도연의 몸으로 해내는 농익은 연기는 어떻게 되나 싶어 걱정되기도 했다. 밀양의 햇살이 어두컴컴한 영화관을 환하게 비추면서 밀양이 드러났고 이내 밀양은 어떤 도시냐고 묻는 전도연과 한나라당이 선거에서 이기고 표충사가 멀지 않은 그저 그런 조그만 도시라고 답변하는 송강호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밀양”은 어떤 영화인가?
밀양이 어떤 도시인가를 답하기 전에 “밀양”은 어떤 영화인가를 먼저 말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영화 밀양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고유명사를 보통명사로 바꿔놓은 영화다. 경상도에 있는 한적한 소도시의 이름인 고유명사 밀양에 “은밀한 햇빛”의 상징을 가미하여 보통명사“밀양(Secret Sunshine)”이라는 타이틀의 영화가 탄생된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송강호가 설명한 한나라당이 승리하고 표충사가 가까운 소도시 밀양의 거리를 본 것이 아니고 애지중지하며 키워온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을 주님의 뜻을 따라 용서하고자 교도소를 찾은 한 어머니가 자기보다 먼저 범인에 은밀하게 구원의 햇빛을 주시고 용서하신 주님께 분노하고 저항하는 처절한 삶의 현장 밀양을 보았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중죄를 저질렀다 해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참회한다면 그가 누구라 해도 용서하시고 구원의 햇빛을 주신다는 점도 보았고 이 구원의 햇빛이 은밀하게 내려졌을 때 배신감을 느끼는 한 어머니의 절망도 보았다. 또 평범하지만 진지하게 사는 한 젊은이의 무조건적 사랑이 신에게서 배신당했다며 절망하는 한 여인에 은밀한 구원의 빛이 되고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은밀한 햇빛이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라면 그 빛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던 구원의 햇빛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영화 “밀양”은 고유명사 밀양을 이제껏 뜻해온 어느 한 도시의 지명을 뛰어넘어 은밀한 햇빛이 상징하는 구원임을 보여주어 보통명사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이창동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은밀하게 숨겨진 소도시 밀양이라는 이름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해 작가정신을 최대로 살려낸 것은 다름 아닌 이 감독의 노고가 결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관으로서 이창동은 실망스러웠지만 감독으로서 이창동은 여전히 진지했다.
몇 해 전 밀양에서 어린이 성폭행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보고 분노한 일이 있다.
어느 도시인들 이런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랴만 유독 이 기사가 크게 난 것은 밀양이란 도시의 작은 규모 때문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도 아니고 규모가 비할 수 없이 아주 작은 밀양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들통이 안 나고 은밀하게 진행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 영화로 밀양이 유괴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덧칠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덕에 이제 온 세계로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밀양을 엄습해온 부정적 의미의 은밀함은 이제 모두 털어내고 구원의 의미로서 은밀함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기대해본다. 오랜만에 인생을 성찰하는 원작자의 수준 높은 작품을 진지하게 재현한 이창동감독과 열연한 전도연과 송강호 등 배우들에 감사한다.
내가 첫발을 들인 1997년 겨울 밀양에는 따뜻한 햇살이 가득했었다.
영화에서 만나본 은밀한 구원의 햇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오는 겨울에 밀양을 찾아볼 뜻이다. 물론 그 전에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읽고 나서 밀양을 찾아 나설 뜻이다.
2007. 6. 28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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