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구간:조계산-빈계재-석거리재
*산행일자:2007. 7. 21일
*소재지 :전남순천/보성
*산높이 :조계산884m/고동산709m/백이산584m
*산행코스:선암사주차장-조계산-고동산-빈계재-백이산-석거리재
*산행시간:6시40분-17시47분(구간종주 8시간46분/총 11시간7분)
*동행 :나홀로
혼자서 정맥 길에 발을 들인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아직도 멧돼지와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지 않고 긴장상태가 계속되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이래 최고의 맹수로 군림하고 있는 멧돼지는 저처럼 혼자서 정맥을 종주하는 산 꾼들에는 위협적인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먹이사슬에서 사람이 최고 정점에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이기 덕분이고, 호신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1m가 조금 넘는 스틱 하나만을 믿고 산 속에서 멧돼지와 한판 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멧돼지와 서로 해치지 않고 도와가며 지내자고 친선조약을 맺어 지켜나가는 것이 상책이고, 아예 멧돼지가 나타날 만한 길을 비켜가 산속에서 조우하지 않는 것이 중책이며, 어쩔 수 없이 만나서 피할 수 없다면 기죽지 않고 한판 붙어보는 것이 하책일 것입니다. 마루금을 이어가야하는 종주 꾼들은 멧돼지가 다니는 길이 정맥 길이라면 달리 피해서 다른 길로 갈 수는 없기에 중책을 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판 붙어보는 하책은 더더구나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대가 도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멧돼지라 하더라도 제 진정을 알려주어 어떻게 친선조약을 맺고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을까 하고 상책을 궁리하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친선조약이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멧돼지가 무슨 수로 조약을 맺을 수 있을 까 싶었는데 얼마 전 멧돼지에 먹이를 주며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어느 산 속의 노부부를 텔레비전에서 보고나서 짐승과의 대화에는 정성이 깃 들인 묵언의 대화가 더 유용함을 알았습니다. 그런 후로는 혼자서 산에 들면 멧돼지를 돈공으로 부르며 오늘 하루 서로 불편하게 하지 말고 가까이 지내자고 마음속으로 비는 일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아직도 멧돼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저 포악한 멧돼지가 제 진정을 정말 헤아릴 수 있을까 설사 그리하고 싶어도 언어가 다른데 제 진정을 알아낼 수 있을 까 의심하면서 저의 항심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멧돼지가 분탕질을 한 흔적을 보면 스틱으로 돌을 치고 헛기침을 하며 멧돼지에 제가 지나감을 알려주는데 이 스틱소리가 상당히 멧돼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는가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멧돼지는 이 소리를 피해 자리를 옮겨갔습니다. 스틱으로 효과를 본 저는 언제부터인가 멧돼지와 가까이 지내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손쉬운 스틱소리로 멧돼지를 내쫓는데 치중해왔습니다.
어제는 멧돼지 한 마리가 이 스틱소리에 대담하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조계산의 큰굴목재를 출발한지 반시간이 조금 넘어 산불감시초소를 막 지났습니다.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이 역력해 감시초소 4-50m전방에서부터 스틱소리를 내며 어서 빨리 사라지라고 혼자서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정도로 사람소리를 내면 웬만한 멧돼지들은 자리를 옮기지만 어제 간과를 한 것은 내리는 비였습니다. 멧돼지도 털 달린 짐승이라 비가 퍼붓는 날에는 한 곳에서 비를 피해 움츠리고 있는데 이런 날 자리를 옮겨달라고 스틱을 쳐대면 저라도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2004년 9월 덕유산의 빼재에 못 미쳐서 멧돼지가 비를 맞으며 능선 길을 가는 제게 비켜가라고 경고음을 계속 보내 길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가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도 어디엔가 숨어 있는 멧돼지가 쩌렁쩌렁하게 산을 울리며 더 이상 다가서지 말라고 경고음을 보냈습니다. 지난 달 한재에서 멧돼지와의 소리싸움을 제가 한번 이긴 적이 있어 이번에도 더 큰 소리를 내며 밀어붙일 양으로 앞으로 나갔더니 멧돼지의 굉음이 다시 한번 산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멧돼지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하고 나서 어쩌겠습니까, 제가 물러서야지요. 큰 소리로 3-4합을 더 겨뤄본 후 안 되겠다 싶어 먼저 꼬리를 내리고 감시초소로 물러났습니다. 그 다음부터 진퇴양난이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뒤늦게나마 다시 마음속으로 돈공을 불러내어 화해할 것을 얘기하며 7-8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진했습니다. 저의 화해를 받아들였는지 돈공은 어디론가 자리를 옮겼고 저는 두려움 속에 서둘러 안부로 내려섰습니다. 멧돼지들이 여기저기에 변을 보는 것은 여기서부터는 자기 영역이니 들어서지 말라는 경고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정맥 길을 이어가는 저로서는 달리 피해갈 방도가 없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고 마루금을 잇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돈공에 제 진심을 전하고자 그리 애쓰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길을 내주지 않을 듯한 멧돼지가 결국 길을 내준 것으로 보아 앞으로는 돈공들과 어느 정도 대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 제가 진정 저 멧돼지를 포함한 모든 산식구와 한 일원이 될 각오가 세워졌다는 전제에서 말입니다.
아침6시40분 선암사주차장을 출발했습니다.
밤차로 순천에 내려와 역사에서 2시간을 보낸 후 5시50분에 출발하는 선암사행 첫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얼마큼 지나자 버스 안에는 승객이라고는 저 밖에 없어 괜스레 기사분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벼들이 거의 다 자란 시골 논 뜰이 가을의 풍요로움을 잉태해가고 있어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삼인당 연못까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넓은 비포장도로를 걸어 선암사 경내로 들어서자 아침청소로 스님들이 분주했습니다. 배낭을 메고 나다니기가 미안해 대웅전과 그 유명한 해우소만 사진 찍고 바로 경내를 빠져 나왔습니다. 비를 맞자 더욱 어둡게 보이는 울창한 편백나무 숲을 지나 다다른 대각암 사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들어서 장군봉으로 향했습니다.
9시1분 해발 884m의 장군봉에 올랐습니다.
두 주전 내려올 때는 반시간도 채 안 걸린 대각암사거리-샘터 길을 이번에 오르는 데는 한 시간이 다 걸릴 정도로 경사도 급하고 계단도 많았습니다. 가까이에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샘터에서 십 여분을 쉬면서 차디찬 샘물을 받아마시자 밤차에 시달린 몸과 마음이 한결 개운했습니다. 산죽들이 정상 가까이까지 길안내를 해준 오름길은 비가 내려 미끄러웠습니다. 이 산의 상봉인 장군봉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번번이 날씨가 나빠 한번도 전망이 제대로 트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마침 비가 그친 틈을 타 모여든 잠자리 떼들이 정상석을 맴돌며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일러주어 고마웠습니다. 정상석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비로소 정맥종주 길에 나섰습니다.
9시50분 선암사와 송광사로 길이 갈리는 십자안부인 큰굴목재로 내려섰습니다.
장군봉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확 틀어 남쪽을 향해 고도를 낮추어 갔습니다. 한국판 “노아의 방주”의 전설을 갖고 있는 배맨바위의 아래쪽 바위에 올라서자 구름이 이동하면서 조계산의 산자락들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가히 장관이었습니다. 계곡을 가득 메웠던 구름들이 산 능선으로 물러나면서 내보이는 정경은 언제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서둘러 카메라에 옮겨 실었습니다. 경사 길이 끝난 작은굴목재에서 큰굴목재까지 넓은 길은 오르내림이 별로 없고 편안한 흙길이어서 가히 명상의 길이라고 명명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굴목재에 이르러 짐을 내려놓고 10분을 쉬는 동안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부부 한 팀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분들이 이번 산행 중 만난 유일한 분들입니다. 두 주전 송백산악회와 산행 시 제가 너무 뒤쳐져서 노고치를 출발해 여기 굴목재까지 오지 못하고 중간에 장군봉에서 하산을 해서 결국 이번에 다시 장군봉을 올라가 돌아오느라 주차장에서 바로 큰굴목재로 올라서는 것보다 2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10시54분 장안치를 지나며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조계산이 굴목재에서 끝나서인지 이 고개를 지나 첫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우회하자 길이 다시 좁아졌고 이내 풀숲길이 나타났습니다. 임도를 지나 산 오름을 계속하는 동안 멧돼지가 방금 분탕질을 한 것 같은 흔적이 나타나 긴장됐습니다.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진 봉우리에 올라 심호흡을 한 후 스틱으로 돌을 두드리고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며 2-3분을 전진하자 능선 왼쪽 아래에서 몸을 숨긴 멧돼지가 괴성을 질러댔습니다. 서너 번 맞고함을 쳤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으르렁대어 별 수 없이 초소로 되돌아가 한판 붙기로 마음을 다져먹고 멧돼지의 출현을 기다렸습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멧돼지가 이쯤해서 마루금을 이어가야하는 제 사정을 감안해 조용히 물러서줄 것을 간절히 바랬습니다. 이 곳에서 종주산행을 중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시간이 얼마고 흐른 후 다시 앞으로 나섰더니 다행히도 돈공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진 700.8봉까지 정신없이 내달려 시계를 보니 10시45분으로 감시초소를 떠난 지 10분밖에 안됐는데 몇 시간이 지난 것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본격적인 풀 숲길이 나타나 팔다리가 가시에 찔리자 비로소 멧돼지의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경고메시지만 보내고 자리를 비켜준 멧돼지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12시13분 해발 709m의 고동산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장안치에서 올라선 697봉 바로 왼쪽 아래 공사장에 기자재가 널려있었습니다. 풀들이 무성한 넓은 헬기장을 지나 660봉을 넘는 길에 멧돼지가 지난 흔적이 다시 보여 긴장됐습니다. SKT기지국이 있는 시멘트도로로 내려서 차도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고동산에 오르고자 왼쪽 길로 들어서 7-8분을 걸었는데 고동산이 나타나지 않아 나침판을 꺼내보았습니다. 엉뚱하게도 제가 고동산과는 정반대방향인 북쪽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10m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자칫 잘 못하다가는 이 곳에서 계속 맴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멈춰 서서 생각을 가다듬었습니다. 다시 원 위치해 큰 길로 나온 후 10분 가까이 북진을 계속하자 왼쪽으로 희미하게 고동산 정상에 자리한 중계탑시설물이 보였습니다. 안개만 걷히면 쉽게 찾을 산을 마음을 졸이며 오르다 보니 밋밋한 초원의 구릉에 세워진 정상석이 엄청 반가웠습니다. 잠자리 한 마리가 바로 옆에 앉아 인절미를 먹고 있는 저를 끝까지 지켜보아 조금은 민망했습니다. 고동산에서 고동치로 내려서는 철쭉 숲길이 고생스러웠습니다. 편안한 큰 길로 가도 만날 것을 고집스레 풀 숲길을 헤치며 마루금을 이어가는 것은 다름 아닌 정맥종주이기 때문입니다. 고동치의 시멘트도르를 건너 임도를 따라 봉우리를 우회해 직진하다가 봉우리의 우회가 끝나는 즈음에서 임도를 버리고 왼쪽으로 꺾어 좁은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580봉과 구릉 길의 바윗돌무더기를 지났고, 녹슨 철조망이 쳐있는 봉우리를 지나 삼각점이 매설된 511.2봉에 오른 시각이 13시30분이었는데 풀 숲길을 지나느라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15시6분 빈계재를 건너 20분 남짓 쉬었습니다.
줄기차게 내리붓는 장대비는 아니었지만 가느다란 빗줄기가 시도 때도 없이 치근거리고 숲길을 뚫고나갈 때마다 옷이 젖어 짜증이 났습니다. 511.2봉을 출발한 얼마 후 키를 넘는 철쭉나무(?) 터널을 지나 519봉으로 오르면서 여름산행의 진수를 맛보는 듯 했습니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는 길에 이번에는 먼저 울타리보다 훨씬 새것인 마름모꼴 철망울타리를 만났습니다. 봉우리를 올랐다가 빈계재로 내려서기까지 반시간 동안이나 울타리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무지막지한 풀 숲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빈계재 조금 못 미쳐서 철망 울타리는 우측으로 꺾어 멀어지고 빽빽이 들어선 편백나무 숲을 지나며 이런 보너스 길도 있어서 정맥종주를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멧돼지와 승강이를 벌인데다 풀 숲길을 헤쳐 나가느라 여느 산행보다 더 힘이 들었는지 빈계재에 다다르자 시장기가 느껴졌습니다. 긴 시간을 쉬면서 남은 떡을 마저 들어 백이산을 걸어 오를 에너지를 충전했습니다.
16시21분 시원하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584미터의 백이산을 올랐습니다.
빈계재에서 긴 휴식을 끝내고 봉우리에 오른 다음 오른쪽 사면이 벌목지인 능선 길을 지났습니다. 나지막한 봉우리 2개를 더 지나자 왼쪽 아래로 아주 가까이 바다가 보이자 그동안의 피로가 한 순간에 가셨습니다. 가을이 오면 환상적일 광활한 억새밭 길을 지나며 현재는 입산이 금지된 지리산 종석대의 드넓은 풀 밭길을 걷는 듯해 황홀했습니다. 마지막 가파른 비알 길을 단숨에 올라 백이산에 다다랐습니다. 표지석이 세워진 정상부는 평평한데다 사방이 탁 트인 최고의 전망지였습니다. 비가 그치고 산자락에 걸쳤던 구름들이 서서히 걷히어 이제껏 걸어온 능선길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먼발치로 꽤 높은 봉우리들이 여럿 보였는데 남서쪽의 높은 산만 존제산으로 여겨질 뿐 나머지 산들은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없어 제게는 모두 무명봉이었습니다. 봉우리 이름을 낱낱이 몰라 무명봉이라 쓴 것을 봉우리 이름으로 잘 못 안 한 후배가 선배님 산행기에는 왜 그리도 무명봉이 많이 나오느냐고 물어와 웃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산행에서도 수많은 무명봉을 오르내리고 또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2,100산을 넘게 올랐다는 김정길님은 어떤 기준으로 그동안 오른 산들 하나하나를 셌을까 궁금했습니다. 지형도에 나와 있는 “**산”만 세야 하는지, “**봉”을 같이 세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자주 쓰는 무명봉도 이름을 알고 있다면 포함시켜야 하는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분이 대략적으로 추정한 남한의 산 2,500산을 기준으로 해서 80%를 넘게 오른 셈인데 지형도에 이름이 나와 있는 산을 기준으로 아직도400산을 채 못 오른 저로서는 이 분의 산 오름이 정말 감탄스러웠고 존경의 마음이 일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17시47분 15번 국도가 지나는 해발240m의 석거리재로 내려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백이산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내리뻗은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넙적바위를 만나 짐을 내려놓고 등산화 속으로 스며든 빗물을 빨아들여 흥건해진 스타킹을 벗어 단단히 짜낸 후 다시 신었습니다. 한참을 내려섰다가 다시 오른 봉우리에서 임도로 내려서는 동안 산자락에 내려앉기 시작한 어둠이 감지되어 하산을 서둘렀지만 풀 숲길과 나무터널 길이 여전했고 내림 길의 경사가 급해 생각만큼 속도가 붙지 않았습니다. 밋밋한 능선을 가로 넘는 임도를 건너 맞은편의 낮은 봉우리에 오르자 석거리재의 주유소와 휴게소가 보였고 얼마고 내려서자 주유소의 흰 개 한 마리가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면서도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계속 짖어댔습니다. 빈계재로 내려서 표지석을 사진 찍고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휴게소를 들러 맥주 2병을 사마신 후 외서리를 출발한 시내버스를 타고 벌교로 나가 다음 하산지인 무남이재에서 조성으로 가는 교통편을 확인했는데 택시이용이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벌교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향하는 중 멧돼지와의 대치시간을 떠 올렸습니다. 대치의 근본 원인이 서로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어 혹시나 해치지는 않을까 못 믿는데 있기에 문제의 해결방안도 신뢰구축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돌이켜보면 한북정맥의 수원산에서 멧돼지를 처음 만나 경악했던 3년 전에 비해 이제는 비교적 차분하게 대할 수 있을 만큼 멧돼지에 대한 제 믿음이 많이 커졌습니다. 멧돼지 또한 저를 보고 무조건 덤벼들지 않고 자기 영역에 들어오지 말라는 정도의 경고메시지만 보내와 어느 정도 저를 신뢰하는 것 같았습니다. 워낙 큰 소리를 질러대 순간 두렵기도 했지만 조금 더 노력하면 멧돼지와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될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쳤던 산나리와 비추리 꽃밭에서 앞으로는 마음 놓고 쉬어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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