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호남정맥 종주기

호남정맥 종주기 8 (석거리재-존제산-무남이재)

시인마뇽 2007. 7. 28. 10:19

                                        호남정맥 종주기 8


          *정맥구간:석거리재-존제산-무남이재

          *산행일자:2007. 7. 22일

          *소재지  :전남보성 

          *산높이  :존제산 704m

          *산행코스:석거리재-485.5봉-주릿재-존제산-천치고개-613봉-무남이재-조성역

          *산행시간:7시36분-18시56분(구간종주 9시간34분/총 11시간20분)

          *동행    :나홀로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밤마다 스스로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고 있는 그믐 달빛은 스산하게 흐렸다. 달빛은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했고, 어둠은 달빛을 마음대로 물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달빛과 어둠은 서로를 반반씩 섞어 묽은 안개가 자욱히 퍼진 것 같은 미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위 글로 시작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노라면 우리 말글을 이토록 아름답게 다듬은 작가 조정래 선생에 존경의 마음이 절로 입니다. 중학생 때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의 기미독립선언문을 배우며 도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독립선언문과 공약 3장을 달달 외운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육당 최남선 선생이 쓴 글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백성들이 알아먹게 써야 하는데 거의다가 한자 단어로 된 이런 글로 어떻게 독립선언을 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단언하건대 기미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재야사학가 이이화선생의 지적처럼 우리 선조들이 뜻도 모르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에 감동해서가 아니고, 일제의 만행에 대한 그동안 쌓인 분노가 고종의 장례식을 맞아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갈고 닦은 분들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소설가들입니다. 그 후 홍명희, 최인훈, 이청준 선생 등의 뛰어난 소설가들이 우리 말글을 갈고 닦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독립선언문과 같은 난해한 글들을 명문장으로 받들며 열심히 자전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태백산맥”을 통해 묻혀있던 우리의 말글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새롭게 다듬어낸 공만으로도 선생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소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습니다.

선생의 뛰어난 글 솜씨에 매료되어 자칫 공산주의와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긍정적 태도를 갖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소설이 출간되던 1980년대가 반문명적인 폭거로 집권했던 5공화국 때여서 많은 사람들이 이 정권에 반하는 것은 모두가 정의라는 생각을 얼마고 갖고 있던 때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한번 잡으면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어 밤을 새가며 읽으면서도 작가와 대립적인 입장에 서서 비판적으로 읽어가느라 엄청 힘들었습니다. 왼쪽날개를 이토록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여주는 선생과 겨룰만한 분이 오른 쪽 날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가들 중에는 왜 없을까 하고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미 검찰에서 오랜 숙고 끝에 무혐의로 처리했듯이 선생의 “태백산맥”이 좌경불온서적으로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선생이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이 소설을 읽고난 후 많은 분들이 왜 그동안 포스터에 빨간 색깔을 이렇게 적게 썼냐며 파란 색의 크레파스를 내다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것 같아 얼마고 불안했습니다. 6.25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전체를 비극의 바다로 침몰시킨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이유로든 남쪽의 집권세력보다 더 도덕적인 것처럼 미화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저의 소견이었기에 “태백산맥”을 다 읽고나서 이 소설을 비판한 어느 한 분의  “소설 태백산맥 그 현장을 찾아서”를 사 읽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연 이틀 종주한 조계산-석거리재-무남이재 구간의 호남정맥 연봉들은 5-60년 전에 소설에서 묘사된 산 아래 해방구에서 좌우의 대립으로 수많은 지역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던 산봉우리들입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해방구였던 인근 지역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당시의 고통스러운 흔적은 온데 간 데 없어지고 이제는 다들 남부럽지 않게 살만하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를 보고 당시에 억장이 무너졌을 호남정맥의 연봉들도 이제는 기뻐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석거리재에서 시작한 8구간 종주를 무남이재에서 마치고 1시간 20분 동안 대곡리 저수지와 논 뜰을 거쳐 조성 역까지 천천히 걸어가며 “태백산맥”의 현장들을 느긋하게 보기도 하고 소설의 몇 장면들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경향이 어떠했든 좌우이념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민중들이 겪은 참담한 고통의 실상을 “태백산맥”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 없기에, 이번의 호남정맥 종주는 “태백산맥”의 현장을 지났다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뜻 깊은 산행이 되었습니다. 


  아침7시 36분 해방구 벌교와 외서를 이어주었던 해발 240m의 석거리재를 출발했습니다.

순천 시내 찜질방에서 하루 밤을 묵고 아침 일찍 공용버스터미널로 나가 직행버스를 타고가다 벌교에서 하차했습니다.  벌교는 군청소재지가 아니면서도 경찰서가 있었을 정도로 꽤 큰 읍내였다는데 지금은 많이 후져보였습니다. 터미널에서 백반을 사든 후 7시 정각에 외서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20분 만에 다다른 석거리재에서 하차해 산행 준비를 한 후 고개 넘어 바로 왼쪽 숲길로 들어섰습니다. 하늘이 쾌청해 아침부터 햇살이 따갑게 느껴졌습니다. 숲길을 뚫고 나가 만난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오른 쪽 능선으로 붙어서 땀 흘리며 얼마고 올라 415봉을 지났습니다. 415봉에서 40분을 더 걸어 8시55분에 한 구릉에 올라 첫 쉼을 갖기까지 대부분이 그늘진 능선 길이고 풀 숲길을 몇 번 만났어도 아주 짧아 그리 힘든 줄 몰랐습니다.


  9시32분 오른 쪽 아래로 빨간 지붕의 집 한 채가 아주 가깝게 보이는 500봉 바로 옆을 지났습니다. 형체가 있다면 사진을 찍어서 집에 갖다 놓고 싶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산 밑에서 불어와 오른 쪽 사면이 벌목지인 능선을 지날 때도 햇살이 그리 따갑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벌목지를 지나 500봉 구릉 바로 밑으로 지나는 능선 길을 가로막은 잡풀들은 이번 코스 거의다가 풀 숲길이니 단단히 각오하라고 귀띔해주는 인디케이터(Indicator)였습니다. 임도로 내려선 후 얼마 안가서 삼거리가 나타나 왼쪽으로 90도 이상 꺾인 길로 방향을 잡고 가다 이내 차량통제용 쇠줄을 건너 왼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넓은 억새밭을 통과해 500봉을 넘자 존제산의 KT중계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철쭉나무 길을 올라 삼각점이 세워진 485봉을 지난 시각이 10시13분으로 시원한 바람이 여전히 불어와 잠시 선채로 쉬면서 숨을 돌렸습니다. 


  11시8분 895번 지방도가 지나는 주릿재로 내려섰습니다.

485봉에서 아스팔트길로 내려서는 내림 길은 경사가 꽤 급했습니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 커다란 소나무 밑 등에서 자라고 있는 노란 버섯을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에 기생하는 버섯을 만난 것은 두타산에서 처음 본 후 2년만의 일이어서 정성껏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개통된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아스팔트길을 건너 철계단을 오르는 동안 헬기가 머리 위를 배회해 시끄러웠지만, 이 정도의 굉음이라면 전날 제 앞길을 막은 멧돼지를 내쫓기에 충분하겠다 싶었습니다. 철계단을 올라 다다른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벌목지를 지났습니다. 잠시 숲길로 들어섰다가 내려선 임도를 따라 주릿재에 닿았습니다. 쉼터가 조성된 고개 마루를 경계로 오른쪽은 율어면이고 왼쪽은 벌교읍인데 이 모두가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해방구여서 그 당시라면 지금처럼 대낮에 17분씩이나 마음 놓고 편히 쉬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주릿재 고개 마루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 남쪽으로 뻗은 비포장도로는 지금은 철수한 존재산의 군부대로 이어지는 길로 넓고 경사도 거의 없는 도로입니다. 바람 한점 없는 넓은 도로를 복더위의 한 낮에 땡볕을 쬐어가며 걷는 것이 처음에는 그 지긋지긋한 풀숲길보다 낫다 했는데 그것도 한 시간을 넘게 걷자 차라리 풀 숲길이라도 산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백림농장 입구를 지나 꼬부랑 고개 길을 한참을 걸었어도 KT중계소 입구가 나타나지 않아 커브 길 가 나무그늘 아래서 땅바닥에 능을 눕히고 10분을 쉬었습니다.


  12시46분 달콤한 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뢰가 매설되었다 하여 모두가 걱정하는  존제산으로 향했습니다. 10여분 후에 도착한 KT중계소 갈림길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군사도로를 그대로 따라 걸었습니다. 전날 하늘을 덮었던 먹구름은 하늘 한 구석에 움츠리고 있고  새하얀 새털구름, 뭉개구름과 조개구름들이 한가롭게 하늘 높이 떠다니고 있어 여기 저기 세워진 경고판에도 불구하고 존제산의 여름 한낮 풍경이 마냥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백이산 정상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이는 조성 앞바다의 한적한 해안선과 작은 섬들이 하늘의 평화를 받쳐주는 듯 했습니다. 철조망과 으스스한 경고판, 그리고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 조각들을 보며 포크송 가수 정태춘님의 “민통선의 흰나비”의 첫 절을 흥얼거려 보았습니다.


  “맑은 햇살 푸르른 수풀 돌보지 않는 침묵의 땅

   긴 긴 철조망 살벌한 총구 저 갈 수 없는 금단의 땅

   바람에 눕는 억새 위 팔랑거리는 흰 나비

   저 수풀 너머 가려네 저 산도 넘어 가려네”


  14시26분 난코스인 존제산 구간을 무사히 통과해 모암으로도 불리는 천치재로 내려섰습니다.  편백나무 그늘아래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허리 정도 차는 낮은 키의 철쭉나무들이 존제산의 군견묘지 봉우리출발 10분이 지나 마지막 철조망을 넘고 나자 모두들 제 키를 훌쩍 넘었습니다. 지뢰와의 심리전을 끝내자마자  철쭉나무가 끈질기게 발목을 잡으며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표독스러운 철쭉 숲을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아주 짧은 숲길을 빠져나가는데 25분이 걸렸습니다. 천치재로 내려가  편백나무 그늘아래서 25분을 쉬면서 점심을 든 후  14시51분에 다시 고행 길에 나섰습니다. 청초한 야생화마저 없었다면 이번 종주 산행은 정말 황량했을 것입니다. 


  17시10분 무남이재로 내려서서 구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천치재에서 광대코재 조금 못 미쳐 600봉에 이르기까지 풀숲길만 걷느라 시간 반 동안   내내 힘들었습니다. 키가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면 잡풀들이 자리를 잡지 못해 무성한 풀숲길이 있을 수 없는데 사계정리를 위해서든 개간을 위해서든 한번 산비탈의 나무들을 베어내면 그 위의 능선 길은 잡풀과 잡목이 왕성하게 자라 헤쳐 나가기가 웬만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매년 여름 정맥종주로 겪는 일이지만 호남정맥은 다른 정맥보다 벌목지가 많아 풀 숲길이 길고 잦은 것 같습니다. 아무런 등산장비 없이 끼니도 제대로 못 이으면서 이 길로 쫓겨 도망쳤을 빨치산들의 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이 악물고 걸었습니다. 천치재에서 고흥지맥 분기점까지는 가파른 오름길이었습니다. 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뻗어가는 능선 길은 몇 개의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들을 지나 광대코재까지 이어졌습니다. 천치재 출발 44분 후인 15시36분에 삼각점이 매설된 571봉을 지났습니다. 키를 넘는 억새풀을 계속해 헤쳐 나가느라 숨이 막히는 듯 답답했습니다. 40분을 더 걸어 만난 나무그늘 아래에서 짐을 풀고 10분을 쉬었어도 바람이 통하지 않아 땀이 별로 식지 않았습니다. 풀 숲길이 끝나는 600봉(?)에서 바위길이 시작되어 613봉 바로 아래 이정표가 세워진 광대코재까지는 그래도 걸을 만 했습니다. 광대코재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는 무남이재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로프 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풀 숲길을 면하고 편안한 나무 숲길을 걸었습니다. 광대코재 출발 반시간이 지나 시멘트도로가 고개를 넘는 무남이재에 내려섰습니다. 차 한대가 다닐만한 넓이의 길이지만 차가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는 한갓진 길이어서 마음 놓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택시를 부르려고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가 떨어지지 않아  포기하고 한참을 쉰 후 17시36분에 무남이재를 출발해 왼쪽 아래 대곡리 저수지 쪽으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18시56분 조성 역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무남이재에서 골프장 공사로 시끄러운 대곡리 마을로 내려가자 방금 전에 조성 가는 버스가 출발해 아예 조성시내까지 걸어갔습니다. 조성 벌에 물을 대는 대곡리저수지는 산 밑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 “ㄴ”자 모양의 방축이 꽤 길어보였습니다. 꽤 넓은 논 뜰을 가로지르며 40분 가까이 걸어 조성시내에 도착해 조성역을 들렀습니다.


  작은 소도시 조성시내는 면소재지로 거리가 깨끗하고 건물들도 깔끔해 “태백산맥”의 잔흔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해 갈등이 극심했던 이 소도시를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은 공산주의의 북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의 남이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했습니다. 북의 해방구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호남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어 들러볼 수도 없을 뿐더러 어쩌면 오랜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북한의 도시들처럼 외국의 원조로 연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코스인 존제산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안도감에다 승리한 역사의 현장에서 사 마시는 맥주가 더 입에 당겨졌습니다. 그리고 여기 조성 땅이 점점 살갑게 느껴졌습니다. 이만하면 소설 태백산맥도 이제는 긴장의 끈을 놓고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족 한마디는 소설의 제목에 대해섭니다.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은 태백산맥이 아니고 호남정맥입니다. 선생께서 이 소설을 썼을 당시에는 산맥만 있었지 대간과 정맥이 알려지기 전이어서 설사 호남정맥으로 이름을 짓고 싶어도 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호남정맥이라 하더라도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으로 내닫는 태백산맥이 훨씬 장대해 남북의 갈등을 주제로 하는 대하소설의 제목으로는 호남정맥보다 태백산맥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한마디를 사족으로 달며 종주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