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22. 4. 24일(일)
*산높이 : 미숭산 755m, 주산 310mm
*소재지 : 경북고령/경남합천
*산행코스: 합천종합야영수련원-미숭산정상-청금정-주산-지산동가야고분군-가야고분군주차장
*산행시간: 9시30분-15시32분(6시간2분)
*동행 : 대구 참사랑산악회 회원 13명 및 및 서울독립군 회원 3명 등 총16명
난생 처음으로 경북 고령(高靈) 땅에 발을 들인 것은 대구 참사랑산악회에서 올 봄의 합동산행지로 해발755m의 미숭산(美崇山)을 선정해 같이 산행한 덕분입니다. 전설어린 미숭산을 오르고 하산 길에 지산동의 가야고분을 둘러 보고나자 여기 고령이 대가야가가 터 잡았던 본거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고령이 대가야 땅이었다는 것은 고령군의 군청이 ‘대가야읍’에 들어선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경북 고령은 대가야읍과 덕곡면 등 1읍7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년 말 인구는 3만 명이 조금 넘고, 땅 넓이는 384k㎡로 경상북도 전체의 2%에 불과하다하니 군세(郡勢)가 대단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서쪽으로 미숭산이, 남서쪽에 만대산이 위치하여 경상남도와 도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낙동강이 관내 4개 면을 우회하면서 달성군과 경계하여 흐르고. 북은 의봉산과 가야산 줄기가 연결되어 성주군과 접하고 있다.” 라고 고령군청 홈피는 이 지역 지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구 팀과 함께 오른 산은 고령의 미숭산과 주산입니다.
고령일대를 본거지로 정한 대가야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우수한 제철기술과 높은 농업 생산력에 있었다고 박창희님은 저서 『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령과 가까운 합천에서 생산되는 야로 철산은 김해의 금관가야에 이어 또 하나의 ‘철의 왕국’을 구축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령 땅은 농업생산력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았던 것으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이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먼 후대에 발간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 고을(성주, 고령과 합천) 논이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 적은 종자로 많이 수확한다. 그러므로 고향에 뿌리박은 자는 모두 넉넉하게 살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라는 내용이 조선 후기 영조27(1751)년에 발간된 이중환의 『택리지』에 기록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대가야가 결코 만만찮은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지산동의 고분군이 아닌가 합니다. 고령의 진산인 주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동쪽 구릉에 옛 대가야 궁성터와 고령읍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산 능선에 터 잡아 봉긋봉긋 솟은 봉분들이 바로 지산동고분군으로, 이 봉분들은 대가야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흙을 둥그렇게 쌓은 봉토분(封土墳)만 200여기에 이르고 소형무덤까지 더하면 대략 2,000기에 이른다는 지산동 고분군을 걸으면서 느낀 것은 우리 역사에서는 거의 잊힌 가야가 여기 고령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령군 등 관계당국과 주민들이 대가야의 고분을 잘 관리하고 보전해온 덕분이다 싶어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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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이규성교수가 불참해 이번 산행에 같이한 서울의 팀원은 범솥말 회장 등 3명이었습니다. 탑승역이 전부 달라 서대구역에서 하차하고 나서야 얼굴을 본 서울팀은 임상택 대장 등 대구팀원 13명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중간에 논공휴게소를 들러 공터에서 준비해간 아침을 차려든 후 합천 땅으로 이동해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합천종합야영수련원 입구에서 하차했습니다.
오전 9시20분 합천종합야영수련원 입구를 출발했습니다. 하얀 꽃의 조팝나무(?)와 진홍색의 영산홍(?)이 반기는 들머리에서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서 항상 저와 보조를 맞추느라 후미를 맡아 오르는 성봉현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와는 띠 동갑으로 산행속도가 저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성봉현님은 한동안 협착증(?)으로 고생을 했고 지금은 조심해서 산을 다닌다 했습니다. 저는 요즘 강줄기를 따라 걸었더니 등산에 필요한 다리 근육이 많이 풀린 것 같습니다. 50-60대에 1대간9정맥을 종주할 때는 연 이틀 10시간 넘게 산행을 해도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다리근육이 풀려서인지 대여섯 시간만 계속 산행해도 뒷다리가 당기곤 합니다. 이번에 들머리에서 미숭산성까지 경사진 비알 길을 쉬지 않고 올랐는데도 그다지 힘들지 않은 것은 반가운 사람들과 함께 산행을 해서일 것입니다.
산행시작 한 시간이 다되어 도착한 곳은 미숭산성(美崇山城) 터입니다. 이 성은 미숭산의 8부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성의 둘레가 1,325m에 달한다고 합니다. 결코 낮다고 말할 수 없는 이곳에 성을 쌓은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삼국시대에 이 성을 쌓은 산의 원래 이름은 상원산(上元산)이었습니다. 정몽주의 문인인 안동장군 이미숭(李美崇, 1346~ ?)은 고려를 재건하고자 이 산에 성을 쌓고 이성계 군에 항전했으나 고전 끝에 후에 순사암(殉死巖)으로 명명된 바위에 올라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합니다. 길 왼쪽의 우물은 복원된 것 같은데 우물물은 먹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10시39분 해발755m의 미숭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복원된 지 얼마 안 되어 세월의 때를 찾아 볼 수 없는 깔끔한 성벽을 지나 조금 올라가자 멧돼지들이 분탕질을 한 어지러운 공터가 보였습니다. 만개한 하얀 조팝나무와 하늘을 바라보며 활짝 웃음 진 샛노란 양지꽃(?)을 카메라에 옮겨 놓은 후 미숭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정상석이 세워진 미숭산 정상은 산불감시초소도 함께 자리했습니다. 저만치 떨어져 우뚝 솟은 가야산은 52년 전인 대학3학년 때 처음 오른 산으로 추억어린 곳이어서 조망하는 것만으로도 아련함이 느껴졌습니다. 미숭산을 출발해 주산 쪽으로 향하면서 이토록 싱그러운 봄날에 언제 만나도 좋은 이들과 함께 산행해 더할 수 없이 행복했습니다. 저희가 하산하는 나대치(羅帶峙)길을 두고 “신라군과 대가야군의 대치로 긴장이 느껴지는 길”이라 한 것은 안내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밋밋한 장승(?)은 쉼터 옆에 서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지만 목석같이 미동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고만 있었습니다. 나대치길을 지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아주 작은 천제단(天祭壇)을 보고 저희가 걷고 있는 길이 “간절한 기도를 하늘에 전하고자 하는 연인의 길”로 알려진 천제단길임을 알았습니다.
12시30분 청금정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천제단에서 10분을 더 걸어 다다른 곳은반월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능선삼거리로 점심식사가 예정된 청금정까지 1.5Km 남은 것으로 표지목에 쓰여 있었습니다. 반시간을 더 걸어 다다른 삼각점의 해발고도는 412.4m로 안내판에 명기되어 있어 제 시계의 고도를 맞추었습니다. 10분을 더 걸어 다다른 청금정(聽琴亭)은 팔각정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탁 트여 바람이 잘 통했습니다. 대구의 참사랑산악회에서 정성들여 준비해온 음식은 보기 드문 성찬으로 반주가 더해져 점심시간이 더할 수 없이 즐거웠습니다. 주산으로 향하는 하산 길은 한동안 편안했습니다. 길가에 활짝 핀 진홍색의 철쭉 꽃이 영산홍이라는 것은 대구의 박영홍님으로부터 들어 알았습니다. 고령 햄클럽 사무실과 산림보호감시초소가 나란히 들어선 넓은 길에서 주봉으로 오르는 0.24Km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느낀 것은 초여름을 방불하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지쳐서인지 조금은 몸이 부친다는 것이었습니다.
14시30분 해발310m의 주산에 올라 ‘대가야(大加耶) 주산성(主山城)’을 소개하는 안내문을 읽었습니다. “주산성은 대가야읍내를 서편에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고령의 진산인 주산에 조성된 석축산성“이라고 소개한 안내문에 따르면 이 성이 포곡식(包谷式) 산성인 미숭산성과 다른 것은 산정식 내성과 산복식 외성으로 구성된 이중성이라는 것입니다. 주산성은 “정상부인 9부 능선의 평탄한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장타원형 형태의 산정식(山頂式) 내성과 그 동·서편으로 인접하여 완만하게 내려오는 능선과 남쪽 경사면의 6부 능선을 절개하여 축조한 산복식(山腹埴) 외성으로 구성된 이중성”으로 그 외성의 둘레가 1,788m 정도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대가야가 이 성을 축조한 것이 신라군을 막기 위한 것인지 백제군을 방어하고자 한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아무래도 대가야의 주적은 “나대치길” 안내판에 적힌 대로 신라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산 정상에서 그늘진 곳을 찾아 잠시 숨을 고른 후 하산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15시20분 경 고령의 지산동고분군 아래 주차장에 도착해 미숭산 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긴 길을 걷느라 많이 지쳐 지산동고분군의 가야고분들을 자세히 보지 않고 거의 그냥 지나쳤습니다. 안내문을 읽고 확인한 것은 지산동 44호 고분에서 출토된 등잔이나 청동합, 그리고 고아동벽화 고분 등을 보아 대가야는 백제와의 교류가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왜와도 교류를 활발히 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4호 고분과 45호 고분 모두 그 규모가 11년 전에 찾아간 함안의 가야고분군보다 조금 커보였지만, 고성의 송학동 고분군보다는 조금 작아보였습니다. 관리를 잘 한 덕분에 봉분의 잔디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45호고분군은 다 둘러보지 못하고 중간에 아래 정류장으로 먼저 내려가 쉬었습니다.
대구 시내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들면서 참사랑산악회원들과 시간 반 가량 함께 한 후 동대구역에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이규성교수가 이번 산행을 함께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대구팀원들의 마음은 다음에 만날 때 전해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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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껏 고령(高靈)을 도자기의 주원료인 고령토(高嶺土)의 주산지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산행기를 작성하고자 관련 자료를 찾다가 제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잘못 안 것은 고령(高靈)을 고령촌(高嶺村)의 고령(高嶺)으로 착각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맞다고 생각한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과연 그런지 따져보지 않았기에 착각이 오늘까지 이어져온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중국의 대표적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요(景德鎭窯) 부근의 장시성 고령촌(高嶺村)에서 생산되는 점토로 대표되기 때문에 고령토로 불리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번 검색으로 고령토(高嶺土)는 여기 고령 (高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주산지도 남한에서는 경남 하동, 고성, 산청이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해주와 함북 경성 등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저는 사람들의 관계도 과연 건강하고 돈독한 것인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처럼 가끔씩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서정시인 에이츠가 그의 시 「Drinking Song」에서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Wine comes in at the mouth/ Love comes in at the eye)”라고 지은 것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리했을 것입니다. 이 시를 읊고 나면, 자주 얼굴을 보면 없던 정도 생긴다는데, 하물며 있는 정이야 오죽 단단해지랴 싶은 생각이 절로 들곤 합니다. 15년 넘게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쌓아온 우정이기에 봄과 가을의 만남을 빼먹지 않는다면 저희 우정은 앞으로 더욱 돈독해지리라 믿습니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여러분들을 가을에 서울에서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뜁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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