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구간:삿갓재-무룡산-백암봉-지봉-빼재
*산행일자:2004. 9. 17일
*소재지 :전북 무주/경남 함양 및 거창
*산 높이 :무룡산1,492미터/덕유산1,614미터
*산행코스:삿갓재대피소-무룡산-백암봉-향적봉-백암봉-지봉-빼재
*산행시간:6시5분-17시35분(11시간30분)
*동행 :나홀로
이른 새벽에 단잠을 깼습니다.
짐을 챙긴 후 밖으로 나가 덕유산 자락을 뒤덮은 운해를 내려다보니 잠시 제가 마치 제우스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해 오름이 봉우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주위의 구름들이 붉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지켜보며 산 속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이리도 웅장하고 아름다운가를 새삼 느꼈습니다.
아침 6시5분 컵 라면을 사들고 나서 대피소를 출발했습니다.
이슬을 머금고 햇살을 맞는 야생화의 아침인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카메라를 꺼내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헬기장을 지나자 태양이 구름을 뚫고 완전히 올라서 산 속을 구석구석 내 비췄습니다. 밤새 말린 바지는 이슬로 다 젖어 버렸고 양말도 구두 속으로 스며든 물기로 마찬가지로 젖었습니다. 어제 온종일 물기를 담고 있어야 했던 두 발이 오늘도 젖어 있어야 하니 아무리 두발이 내 몸의 일부라 해도 정말 미안한 노릇입니다.
7시 16분 해발 1,492미터의 무룡산에 올랐습니다.
학습효과인지 아니면 벌써 추억 속에 자리 잡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무룡산 정상에서 뒤돌아본 지나온 연봉들이 앞으로 오를 봉우리들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해발 1,350미터대의 케륜이 쌓여 있는 봉우리를 지나자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지금껏 저 혼자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9시 11분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 해발 1,320미터의 동엽령에 이르렀습니다.
칠연계곡과 병곡에서 불어 올라오는 두 바람이 만나는 이곳 동엽령에서 10여 분간 숨을 돌렸습니다. 축축한 옷 속에 숨겨진 제 살갗이 이 시원한 바람을 용케도 알아내고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 내내 산자락을 가렸던 구름이 이제 서서히 산 위로 올라가 그나마 조망할 수 있었던 산봉우리가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10시 25분 갈대밭의 능선을 지나 도착한 백암봉의 송계사 삼거리에서 짐을 풀었습니다.
천봉산악회에서 세운 백암봉 표지석에는 이곳의 높이가 1,503미터로 표기되어 있는데 안내판의 1,420미터가 맞는 것 같습니다. 고생하는 두발을 위해 양말을 벗어 물기를 짜냈습니다.
어제 밤부터 향적봉에서 구천동으로 하산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이곳 백암봉으로 돌아와 신풍령으로 내달려 백두대간을 탈 것인가로 고민을 하였는데 여기서도 결론을 못 내린 채 향적봉으로 향했습니다.
11시 11분 해발 1,594미터의 중봉에 다다르자 넓디넓은 덕유평전이 눈 안에 들어 왔습니다. 아고산대인 덕유평전은 그리 키가 크지 않은 철쭉, 진달래 등의 나무들과 풀꽃 원추리가 자라고 있는데 한번 훼손되면 복구가 어렵다는 안내문을 눈 여겨 읽었습니다. 살아있는 주목나무와 고사목이 되 버린 죽어있는 주목나무가 여기 저기 눈에 띄었고 구상나무 역시 잘 자라고 있어 마치 지리산의 세석평전을 옮겨 놓은 듯 했습니다.
11시 39분 덕유산 정상인 해발1,614미터의 향적봉에 올라섰습니다.
중봉을 조금 지나 이번 산행 중 처음으로 향적봉에서 하산하는 4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향적봉에 올라서자 무주리조트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온 분들로 붐볐습니다. 정상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지리산과 덕유산의 말 산들, 그리고 대둔산, 운장산 모두 조감할 수 있다고 적혀있는데 오늘도 구름에 가려 이 산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향적봉대피소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향적봉대피소에서 맥주를 사들어 덕유산등정을 자축했습니다. 대피소의 목판에 새겨진 쓰레기를 갖고 가라는 내용의 “아니 온 듯 다녀 가소서”라는 문구를 보고 대피소를 지키는 분의 여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들면서 신풍령까지 종주를 하기로 최종 결심하고 페트병에 물을 갈아 채워 긴 시간의 산행을 준비했습니다.
12시 4분 향적봉을 뒤로하고 대피소를 출발했습니다.
55분 걸리던 길을 35분 만에 되돌아가 12시 39분에 도착한 백암봉에서 왼쪽으로 길을 꺾어 횡경재로 내달렸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정말 빨리 달렸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지도에는 횡경재까지만 산행시간이 적혀 있어 신풍령까지 거리가 얼마이고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는 지 알 수 없기에 불안했지만, 지도상의 거리를 목측해 보니 백암봉에서 신풍령까지 12키로 가량 될 것 같아 마음속으로 종주거리를 12키로로 정하고 500미터마다 세워진 표지봉을 세어가며 남은 거리를 헤아렸습니다.
13시 45분 해발1,350미터의 횡경재에 도착했습니다.
향적봉대피소에서 5.2키로 되는 산길을 1시간 41분에 걸었으니 시속 3키로로 내달린 셈입니다. 여기서 지봉까지는 대체로 오름 길이어서 그리 속력을 내지 못했습니다. 지봉 안부에서 본격적으로 오름길이 시작됐습니다.
14시 35분 해발 1,343미터의 지봉에 도착했습니다.
거창군에서 세운 표지석에는 못봉으로 적혀져 있어 지봉의 뜻풀이를 알 수 있었습니다. 표지판에 처음으로 빼재까지 거리가 6.1키로로 안내되었습니다. 백암봉에서 4.9키로를 걸어 이곳까지 왔으니 백암봉에서 빼재까지 총거리는 11키로로 제가 추정한 12키로보다 1키로가 적었습니다. 안개가 산자락을 꽉 채운 것으로 보아 암만해도 큰비가 다시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저 혼자 걷는 초행길이 날씨라도 좋아야 덜 어려울 터인데 뜻대로 아니 될 것 같아 서둘러 지봉을 출발했습니다. 그래도 길섶에 피어있는 노란 야생화에 발목이 잡혀 또 다시 카메라를 꺼내 들어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15시 14분 월음령을 지났습니다.
오늘의 종착지인 빼재까지 4.7키로가 남아 있어 잘하면 17시안으로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고 자연 발걸음이 느려졌습니다. 미국의 죤 코터 교수가 그의 저서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에서 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조직원에 위기감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그 대목에 전적으로 공감이 갔습니다. 해발 1,188미터의 대봉에 올라서자 빗줄기가 거세졌습니다. 월음령에서 대봉을 쉬지 않고 오르느라 상당히 지쳐 있었으나 때맞춰 쏟아지는 비로 제대로 쉬지를 못하고 바로 일어서 내달렸습니다.
16시 20분 해발 1,057미터의 갈미봉에서 쉬지 않고 내달린 것은 힘이 남아서가 아니고 조금 전에 들은 짐승소리가 겁나서였습니다. 갈미봉 100미터 전방의 능선 길을 지나는 중 짐승소리가 나 신경이 쓰였지만 가던 길을 멈출 수 없어 몇 걸음을 더 옮겼습니다. 그러자 그 짐승은 제 모습을 내보이지 않은 채 저의 접근을 막고자 더 큰소리로 경고음을 보내왔습니다. 겁에 질린 저는 차마 짐승의 위치를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습니다. 별 수 없이 그 짐승 앞을 지나기를 포기하고 얼마고 되돌아가 산길 밑으로 한참 내려서 짐승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옮겨가 한참 후에 다시 제 길로 올라섰습니다. 그 2-3분 후 다다른 갈미봉에서 쉴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쉬지 않고 내달렸습니다. 그래도 제게 바로 덤벼들지 않고 경고음을 보내준 그 짐승이 고마웠습니다. 신풍령을 1키로 남겨둔 지점에서 목을 추기고 숨을 돌렸습니다. 그 동안 높고 낮은 여러 봉우리들을 계속해 오르내리느라 많이 지쳤습니다. 앞으로 30분이면 신풍령에 다다를 수 있겠기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쉬면서 남은 떡을 마저 들어 원기를 회복했습니다.
17시 35분 오늘 하루 11시간 반에 걸쳐 23.2키로의 능선을 걸어 기착지인 빼재에 도착했습니다. 어제 아침 육십령을 출발, 총 36.3키로를 20시간동안 걸어 오늘 저녁 빼재에 도착함으로써 이틀간의 덕유산 종주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산행을 끝낸 후 마시는 맥주 맛이 일품인데 휴게소는 물론 주유소도 폐점상태여서 맥주는 고사하고 당장 교통편이 문제였습니다. 다행히도 휴대폰이 터져 거창으로 나가는 택시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거제-무주간 빼재를 지나는 차량이 격감하여 휴게소가 문을 닫았다는 택시 기사 분의 얘기가 변화의 위력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덕유산은 역시 이름그대로 넉넉하고 후덕해 보였습니다.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온 저를 이틀간이나 넓은 가슴으로 안아준 덕유산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종주기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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