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용화리정류장-원골유원지-봉곡교
*탐방일자: 2021. 12. 24일(금)
*탐방코스: 용화리정류장-제원대교-원골유원지-호탄교-송호관광지
-봉곡교 - 외마포교-마포정류장
*탐방시간: 11시5분-16시58분(5시간53분)
*동행 : 나홀로
이번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충북영동의 양산(陽山)을 지났습니다. 갈 길은 먼데 저녁 무렵에 도착해 강선대를 비롯한 양산팔경(陽山八景)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시간이 넉넉지 못해 양산팔경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은 양산에 얽힌 신라의 노래 「양산가(陽山歌)」를 되새겨보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양산가(陽山歌)」는 우리 역사와 더불어 그 이름이 면면히 전해 내려온 신라의 고전시가(古典詩歌)입니다. 고전시가(古典詩歌)란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19세기말까지 우리 민족이 만들고 불렀던 노래 문학 중에 문자로 기록된 것을 일컫는 것으로, 시대를 달리하며 상대시가(上代詩歌) · 향가(鄕歌) · 속요(俗謠) · 경기체가(景幾體歌) · 악장(樂章) · 시조(時調) · 가사(歌辭) · 잡가(雜歌) 등으로 전승되었습니다.
「양산가(陽山歌)」는 향가에 앞서 불렸던 신라의 상대시가(上代詩歌)입니다. 작자 미상의 「양산가(陽山歌)」는 가사가 전해지지 않지만, 어떻게 불리게 되었는가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신라의 29대 태종무열왕 2년인 655년에 낭당대감(郎幢大監) 김흠운이 백제를 치다가, 양산 아래에서 백제군의 야습을 받아 전사했는데,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도 싸우다 같이 죽었습니다. 김흠운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도 나아가 전사했습니다. 이를 애도한 사람들이 지어 부른 노래가 바로 「양산가」입니다.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데는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는 노래가 전파된 것도 한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양산가(陽山歌)」는 삼국시대 후기인 6-7세기에 「실혜가(實兮歌)」, 「천관원사(天冠怨詞)」, 「해론가(亥奚論歌)」 등의 신라시가와 함께 불린 우리 고유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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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터미널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반시간 가까이 기다려 제원면의 용화리로 가는 220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오래 전에 사라진 ‘차장’을 이 버스에서 다시 만나보게 되자, 1963년 한 해 동안 시골집에서 읍내 중학교를 버스로 통학하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는 버스차장이 차비를 받았는데, 이 버스에서 여성차장분은 연세든 승객들의 승하차를 돌보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지난번에 걷기를 마친 용화리에서 하차해 인근의 용강서원(龍江書院)을 들렀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자 재지사족의 근거지였던 서원이 자리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여기 용화리가 제법 큰 마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덕 위에 자리해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서원은 김원행과 송명흠 같은 대유학자들이 강학활동을 이어가 금산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분들 외에 송시열, 송준길, 유계 등의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을 배향해온 이 서원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조치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지역유림들이 강단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용강서원 안내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11시5분 용화리를 출발해 금강 변으로 다가가자 ‘금강 하구 둑으로부터 278Km'라는 글의 안내 폴(pole)이 서 있어 반가웠습니다. 길이 없어진 강둑을 따라 10분쯤 걸어 민가를 지나자 강둑길이 시멘트 길로 이어져 걷기가 한결 편했습니다. 이내 만난 601번 도로를 따라 걸어가 공사구역에 다가서자 왕복 2차선의 차도가 위 아래로 갈리면서 길이 좁아졌습니다. 좁아진 차도를 따라 걷다가 중간에 차를 만나면 피할 공간이 있겠나 싶어 은근히 걱정됐는데, 생각보다 길이 넓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윗길에 자리한 비석은 지금은 없어진 닥실나루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합니다. 바로 위에 제원대교가 놓이자 충북영동과 경상도로 건너가는 큰 나루였던 닥실나루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사라진 것 같습니다.
11시50분 제원대교를 건넜습니다. 도로확장공사구역을 벗어나 마전취수장에 이르자 오른 쪽으로 금강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제원대교가 보였습니다. 이 다리 한 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고 앞서 지나온 금강을 뒤돌아보고 금강의 물흐름이 참으로 도도함을 느꼈습니다. 다리를 다 건너 68번 도로를 따라 걷지 않고 왼쪽으로 내려가 넓은 인삼밭을 오른쪽으로 끼고 시계방향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둑방길을 걸었습니다. 천변의 꽤 넓은 누런 갈대숲 사이로 보이는 짐승은 얼핏 보아 고라니 같은데 저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혹시나 멧돼지가 내려와 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강바람이 냉랭해 둑방길이 끝나는 길가에서 잠시 쉬며 따뜻한 커피로 속을 따뜻이 한 후 햄버그를 꺼내들어 요기를 했습니다. 더 이상 강둑으로 길이 나있지 않아 68번 도로로 복귀해 천내터널을 지났습니다.
13시10분 원골교차로를 지났습니다. 천내터널을 지나 산 중턱에 낸 차도를 따라 걸었습니다. 고갯마루에 막 올라 다다른 교차로에서 내려가는 왼쪽 길로 내려가 금산군이 자랑하는 금강변의 원골유원지로 들어섰습니다. 길가의 여울목 카페가 눈길을 끈 것은 이름이 예쁘고, 건물외관이 깔끔해서인데, 제 철이 아니어서인지 주차한 차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2-3분을 걸어 다다른 원골교차로에서 잠시 머뭇거린 것은 왼쪽으로 제가 가지고 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다리와 터널이 보여서였습니다. 카카오맵으로 다시 확인해 강 건너 터널을 지나는 새 길 대신 구도로를 따라 직진했습니다. 왼쪽 아래 조용히 흐르는 금강을 찬찬히 내려다보면서 마음의 평정이 느껴졌는데, 오른 쪽으로 우뚝 솟은 해발529m의 월영산을 올려다보노라니 위압감도 느껴졌습니다. 충남의 금산군을 지나 충북의 영동군으로 발을 들여 가선리 버스정류장에 다다른 시각은 13시42분이었습니다. 수신교를 지나 이어지는 68번 도로를 따라 걷다 다시 공사현장을 지났습니다. 길가에 곧추선 바위가 갈라져 길 위로 떨어지는 낙석을 막고자 길가 바위를 철조망으로 덮어씌우는 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한 나라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손 볼 곳이 참으로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4시58분 호탄교를 지났습니다. 호탄소교를 지나 만난 모리삼거리는 오른쪽으로 학산을 거쳐 무주로 이어지는 501변도로가 갈리는 교차로입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어 이곳에서 금강따라걷기를 마무리하고 학산을 거쳐 영동역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외마포까지 진행할 생각으로 그대로 직진했습니다. 호탄습지를 지나 다다른 호탄교는 ‘산불조심’의 붉은 깃발이 펄럭여 다리가 온통 뻘겋게 보였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3Km 남짓 북진하면 17년 전 옥천에서 버스를 타고가다 내린 누다리교에 이르게 됩니다. 2007년 여름 이 다리에서 50분가량 서진해 영국사를 둘러본 후 정상을 올랐던 천태산 산행이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호탄교를 지나 다다른 광운관광농원 앞 사거리 정자에서 보온병의 커피를 따라 마시며 10분여 쉬었습니다. 노원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제방 길로 올라선 시각은 15시32분이었습니다.
16시14분 봉곡교에서 11구간 탐방을 마치고 마포로 이동했습니다. 제방길로 올라서자 강 건너 산 중턱에 자리한 봉황대가 보였습니다. 세월교를 건너 양산8경의 4경인 봉황대를 들른 후 강 건너 잔도를 따라 걷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 몰라 포기하고 둑방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금강 하구 둑으로부터 264Km' 지점의 제방에서 왼쪽 아래 천변으로 내려가 산책길을 낸 송호지구의 소로를 따라 걸으며 금강을 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야외수련장 앞에서 다시 제방길로 올라가 차가 다니지 않는 관광용 다리(?)를 지나 송호청소년 수련원 옆 송호관광지에 다다랐습니다. 튼실한 소나무들이 꽤 많이 들어선 솔밭이 일품인 송호관광지를 지나 이내 봉곡교에 이르자 다리 건너 강 언덕의 용바위에 자리한 양산8경의 제 1경인 강선대가 나무들에 가려 불분명하게 보였습니다. 다리 건너 다가가면 사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만 갈 길이 바빠 다음 탐방으로 미루고 이번 여정의 끝점인 마포로 향했습니다.
16시58분 마포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봉곡교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다른 원당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차도를 따라 걸으며 어둠이 빠르게 내려앉는 것이 감지되자 마음이 급해져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습니다. 강 건너 모래사장과 그 뒤 소나무 밭 모두 일품이어서 눈이 자주 갔지만, 이 또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봉곡교에서 외마포교 건너 삼거리까지는 금강 오른 쪽의 차도를 따라 걸었는데, 다음번에는 봉곡교를 건너 금강 왼쪽의 둑방길을 따라 걸을 생각입니다.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떨어진 외마포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젊은이가 있어 영동 가는 버스편을 물어 안내를 받았습니다. 20분 가까이 차도를 따라 남진해 마포교를 건너 도착한 곳이 마포정류장으로 영동-무주를 오갈 때 여러 번 지난 곳이어서 낯설지 않았습니다. 마포정류장에서 10분 남짓 가다렸다가 영동역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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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고전시가 중 가장 오래된 노래는 고조선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무도하(公無渡河) 그대 강을 건너지 마오
공경도하(公竟渡河) 그대 기어이 건너네
추하이사(墜河而死) 물에 빠져 죽으니
당내공하(當奈公河) 그대를 어이하랴
조선진졸(朝鮮津卒) 곽리자고(籗里子高)는 새벽에 배를 손질하다가 흰 머리를 흩뜨리고 술병을 든 채 겁 없이 강을 건너는 백수광부(白首狂夫)와 이를 말리는 그의 아내가 모두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목도합니다. 백수광부와 그의 아내가 물에 빠져 죽는 비극적 이야기를 남편 곽리자고로부터 전해들은 아내는 공후(箜篌)를 뜯으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가 바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로,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공후인(箜篌引)」으로 배웠습니다.
이 노래는 가사가 한자로 기록되어 전승된 데다, 자료 또한 중국의 고악부(古樂府) 형태로 남아 있어 중국노래냐 우리나라 노래냐 논란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요샛말로 하면 이 노래에 대한 저작권 시비가 대한민국과 중국 사이에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기욱과 손종흠 두 교수는 공저한 『고전시가론』을 통해 "고조선 말기에 발생한 우리 민요가 한사군 떼 중국으로 건너가 악부화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땅의 나루를 뜻하는 ‘조선진(朝鮮津)’의 조선은 엄연히 우리의 고조선을 이르는 것입니다. 고조선의 일부가 오늘의 중국 땅에 걸쳐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고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바뀌는 것은 아니니 중국이 뭐라 하든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옛 노래가 소유권을 다툴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시가인 「양산가」의 가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사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혹시라도 가사가 밝혀질 때를 대비해 제목만이라도 꼭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에서 양산을 지나는 길에 이 노래를 상기했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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