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금강 따라걷기

금강 따라 걷기 24(현도교-부강교-햇무리교)

시인마뇽 2022. 11. 8. 12:03

탐방구간: 현도교-합강정-햇무리교

탐방일자:  2022. 11. 3()

탐방코스: 신탄진역-현도교-갑천/금강 합류점-현도오토캠핑장-등곡교-자전거쉼터

                 -아세아제지 공장- 검담서원-부강교-합강정- 햇무리교

탐방시간: 751-1527(7시간16)

동행       : 나 홀로

 

 

  이번 나들이로 금강 따라 걷기는 부강을 지나 금강의 중류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껏 걸어온 금강의 상류부는 전라북도 장수에서 회덕과 신탄진을 거쳐 부강 계선장까지를 이르는 것으로, 그 길이가 268Km에 달합니다. 이 강의 상류부는 산골짜기를 굽이져 흐르는 감입곡류가 발달한데다 다목적댐으로 건설된 용담댐과 대청댐에 저수된 강물이 주변의 산골짜기들을 구석구석 채워 빚어낸 풍광이 참으로 볼만합니다. 금강의 중류부는 부강에서 공주와 부여를 거쳐 강경에 이르는 구간으로 그 길이는 86Km에 달합니다. 옛날에는 배들이 금강하구에서 부강까지 들어와 수운(水運)이 가능했던 구간으로, 공주와 부여에 둘러볼 만한 백제의 유적지가 많이 있습니다. 진강(鎭江)으로도 불리는 금강의 하류부는 강진에서 금강 하구까지로 그 길이는 47Km가 되는데, 금강 전체를 통틀어 수운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구간입니다.

 

  금강의 중류부가 시작되는 부강은 1990년대 중반 자주 지났었습니다. 회사에서 총호남영업부장으로 일하면서 대전사무실에서 조치원 공장을 서너 달에 한번 꼴로 갔었는데, 부강을 그때마다 지났으면서도 금강내륙수운의 종점이자 시작점이었다는 것은 이번에야 처음 알았습니다. 경부철도 개통 전까지는 40-50석 규모의 범선이 주행하였으며 여객기선까지 운항되어 물자와 여객은 물론 통신 연락 상 주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김민영님은 논고 금강수운과 군산·강경지역 근대상업의 변용에서 언급했습니다. 미호천이 합류하는 합강리에서 약 3Km 상류 쪽에 위치한 부강리는 지형상 사행곡류(蛇行曲流)가 가장 발달한 지역입니다. 상기 논고에 따르면 부강이 전국8대 포구였던 것은 하류지역에 호남평야가, 중류지역에 내포평야가 자리 잡고 있어 양 곡창지대를 내륙수로로 연결하는 주요한 결절지점에 위치해 금강내륙수운의 중계포구로써 기능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부강을 중심으로 한 상권은 해안과 내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해안지역에서 내륙으로 올라온 물품은 소금, 명태, 대구, 청어, 새우 , 젓 등 수해산물 등이었고, 내륙지방에서 해안지방으로 내려갔던 품목은 무명, 삼배, , , 임산물 등이었다고 합니다. 1900년경 200척의 범선이 드나들었을 만큼 최전성기를 누렸던 부강도 1909년 경부선의 부강역이 개통되고 1914년 호남선철도마자 개통되면서 빠르게 쇠락했습니다.

 

 

...................................................................................................................................

 

 

  신탄진의 현도교에서 시작된 이번 탐방은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진행하는 것이어서 길을 잘못 들을 일이 없고 오가는 차량들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어 모처럼 마음 편히 걸었습니다. 애초에는 부강에서 이번 탐방을 종료할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8Km를 더 걸어 세종시 초입의 햇무리교까지 진출했습니다.

 

  아침751분 신탄진역을 출발했습니다. 신탄진역 출발 7-8분가량 지나 현도교를 건너며 잠시 멈춰 서서 다리 아래 금강의 물 흐름을 지켜보았습니다. “인생(人生)은 유수(流水)와 같다는 옛말이 문득 떠오른 것은 제 인생도 저 강물처럼 중간에 끊이지 않고 꾸준히 흘렀으면 하는 염원 때문이었습니다. 현도교를 건너 자전거 길은 왼쪽으로 꺾이어 금강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졌습니다. 현 위치 세종 No.80 공주까지 40.0Km의 표지판이 세워진 양지말을 지나 금강 우안의 데크 길을 걸으며 강 건너 아파트촌을 바라본 것은 저 자리가 옛날 한국타이어공장이 들어섰던 곳이 아닌 가 싶어서였습니다. 강 우안의 늪지대에 빽빽이 들어선 버들나무 사이로 빠금히 보이는 금강에는 이름 모르는 물새들 몇 마리가 유영하고 있었습니다. 대전시내에서 흘러내려오는 갑천의 물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금강은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북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금강 우안의 억새 밭 사이에 나 있는 흙길을 따라 걷다가 자전거전용도로로 복귀했습니다. 그 위 차도로 올라서 에스라인승마장을 보자 옛날 배가 다닐 때 부강에서 매매한 주 품목의 하나가 말이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932분 현도오토캠핑장을 지났습니다. 에스라인승마장을 지나 다다른 현도오토캠핑장에는 늦가을인데도 야영을 즐기러 온 젊은이들이 여럿 보였습니다. 저 나이에 한 겨울의 추위를 견뎌내며 여러 번 야영을 했던 제가 저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이제 야영은 귀찮고 불편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70대 중반의 나이에 아직 두 다리에 근력이 붙어 있어 이렇게 하루에 20Km를 걸으며 강줄기를 탐방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께서 건각을 내려주신 덕분이다 싶어 항상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현도오토캠핑장을 지나 강 우안에 바짝 붙여 낸 자전거 길을 따라 걷느라 산 중턱에 자리한 지선정과 월송정을 들르지 못했습니다. 강가에 자그마한 나룻배를 올려놓은 강안 아래 흐르는 금강은 강폭이 넓고 강물이 나루터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낙엽이 길을 덮은 데크 길을 걸으며 그 아래 강에서 떼 지어 한가롭게 놀고 있는 물새들을 보노라니 잠시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강 건너 대전시 대동과 청주시 현도의 주민들에게 일 년 내내 배로 강을 건네주고 받은 삯이 보리 한말과 나락 한말이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는데, 정작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일 시멘트 건물과 폐역인 매포역을 차례로 지나 삼거리에 이르자 쌍용양회 건물이 가까이 보였습니다.

 

 

  1123분 금강변 자전거 쉼터에서 이른 점심을 들었습니다. 삼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등곡교를 건너자 금강은 왼쪽으로 90도 가까이 남쪽으로 휘어 흐르면서 곡류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강변에 마련된 자전거길 쉼터에 앉아 햄버그를 꺼내들면서 10분 남짓 느긋하게 강 위에서 놀고 있는 물새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은행나무 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유난히 눈에 띄는 아세아제지를 지나면서 어느새 가을이 산위에서 평지로 내려앉았음을 감지했습니다. 부용교를 밑으로 지나 뒤늦게 만개한 코스모스꽃이 조금은 애절해 보인 것은 철 지나 핀 이 꽃이 제 모습을 많이 닮았다 싶어서였습니다. 부용교를 지나 잠시 자전거 길에서 벗어나 세종시문화재자료로 등록된 부강(芙江)보만정(保晩亭) 및 검담서원(黔潭書院)’을 찾아 나섰습니다. 조선후기 문신인 송준길(宋浚吉, 1606-1806)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64세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보만정과 검담서원은 1871년 대원군 때 둘 다 철폐되었는데, 1920년 보만정은 복원하였고 검단서원은 묘정비만 세웠다고 합니다. 제게 길을 알려준 할머니 한 분께서 관에서 내려오신 분이면 돌아가서 저렇게 방치할 것 같으면 문화제에서 해제해달라고 말씀해주세요.‘ 라고 말씀하신 본 뜻은 검단서원에 이른 후에야 알았습니다. 담 쪽으로 다가가 안쪽을 들여다보니 잡초가 무성하고, 하나 있는 쪽문이 닫혀 있는 듯해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밖에서 보만정 건물과 검담서원매패소(黔潭書院埋牌所)임을 알리는 비석만 사진 찍고 자전거 길로 복귀해 금강 따라걷기를 이어갔습니다.

 

  134분 부강교를 건넜습니다. 부강농공단지를 지나자 강변 우안에 자리한 습지가 꽤 넓게 펼쳐졌습니다. 버드나무와 갈대들이 주종인 습지를 지나 다다른 곳은 금강하구둑을 123Km 남겨둔 강둑사거리였습니다. 왼쪽 아래로 금강 위에 놓인 가교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강둑사거리에서 정감어린 가교를 사진 찍은 후 그대로 직진해 부강교를 건넜습니다. 부강역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백천이 이 다리를 지나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바로 앞의 합류점이 부강-금강하구 간의 수운이 시작되었던 부강포구였던 것 같습니다. 부강교를 건너 데크길에서 오랜만에 사마귀를 만나 사진을 찍으면서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가 생각났습니다. 중국 제 나라 장공이 사냥을 나가는데 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멈추려 했다는데서 유래한 당랑거철은 제 역량을 생각하지 않고 강한 상대나 되지 않을 일에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거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데크 길을 지나자 머리 위로 금강을 가로 지르는 진황색의 트러스 철교가 보였습니다. 이 철교를 밑으로 지나자, 카카오맵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트러스 교가 보였고, 그 뒤로 사장교(?)인 아람찬교가 보였습니다. 가교와철교, 무명의 트러스교와 사장교인 아람찬교를 연이어 지나면서 마치 다리박물관을 관람하는 것 같았습니다.

 

  1524분 햇무리교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조치원역으로 출발하는 것으로써 하루 걷기를 마쳤습니다. 도시바람길 조성공사로 어수선한 합강공원 끝머리의 구릉에 세워진 2층 누정의 합강정(合江亭)에 오르자 미호천과 금강의 합수점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충북음성군의 보현산(해발482m) 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미호천은 청주와 조치원을 거쳐 저 아래 합수점에서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의 제1지류로, 그 길이는 89Km에 이릅니다. 22년전 합강정을 들른 신정일님은 저서 우리 강 따라 걷기 금강 401Km 에서 대전 아랫부분까지 0.511ppm으로 흐르던 금강이 이곳 미호천을 지나며 3급수로 전락한다.”고 개탄했는데, 먼발치서 보아서인지 미호천은 그다지 탁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합강정에 올라 세종시 쪽으로 흘러내려가는 금강을 조망하자 오른 쪽 먼발치로 진월산이, 강 건너 왼쪽으로 세종시청이 들어선 아파트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만한 승지를 산수를 즐기는 조선의 문인들이 발걸음을 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송준길, 남용익, 조지겸, 채팽윤, 윤순, 이재 등 문인들이 이 정자를 찾아 올랐고, 정조 때 명재상인 채제공(蔡濟恭)을 종손으로 둔 중기(仲耆)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은 합강의 경관에 감탄해 한시 합강정(合江亭)을 남겼습니다. 아래 시 合江亭의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에 실린 希菴先生集卷之十六 詩 峴山錄() 蔡彭胤仲耆甫著에서 옮겨왔고, 번역문은 참마음님의 블로그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에서 따왔는데, 이 블로그는 溪雲 金正坤선생께서 번역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峽坼雙流合 탁 트인 골짜기 두 줄기를 모아

無情如有情 무정이 유정인 듯

紅亭出其上 붉은 정자 위에 솟아

縹緲揷空明 어렴풋이 달그림자로 꽂혔네

列峀丹靑活 늘어선 봉우리 울긋불긋

飛波日夜鳴 물결 날며 밤낮 울어대니

征途困煩鬱 가는 길 울적한 마음

到此十分淸 여기 이르자 선명히 맑아지네

 

  이 시의 번역문은 채팽윤은 가는 길 울적한 마음여기 이르자 선명히 맑아지네라고 합강정에 오른 소회를 밝혔는데 저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합강정에서 내려가 미호천 위 무명교를 건너 강변에 바짝 붙여 낸 인도를 따라 걷다가 이내 자전거길로 복귀했습니다. 금강과 96번 도로 사이에 낸 자전거 길을 따라 걸으며 택시를 부를 만한 적당한 곳을 물색한 것은 자전거전용도로로는 택시가 다닐 수 없어서였습니다. 한참 동안 걸어도 택시를 부를 만한 곳을 찾지 못해 자전거전용도로에서 위쪽 차도로 올라갔습니다. 96번 차도를 따라 세종시 쪽으로 진행해 세종교차로에 다다른 시각은 1514분이었습니다. 더 이상 진행하다가는 산본역에서 저녁 6시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금강 따라 걷기는 여기에서 끝내고 택시를 잡을 뜻으로 햇무리교를 건너 아파트촌으로 이동했습니다. 다리를 거의 다 건널 즈음 마침 빈 택시가 지나가 이 택시를 세워 조치원역으로 이동했습니다.

 

 

....................................................................................................................................

 

 

  강줄기를 따라 걸으며 항상 느끼는 것은 강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강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을 공급하는 생명 줄이기 때문입니다.

 

  박석순교수는 저서 수질관리학 원론에서 문명 하천의 기능을 아래와 같이 나누어 상론했습니다. 첫째, 치수기능입니다. 강우현상에 의해 지면에서 유출된 물이 하류로 이동함으로써 홍수를 막아줍니다. 둘째, 이수기능입니다. 생활용수, 농업용수, 산업용수 등 필요한 물을 공급합니다. 셋째, 배수 정화기능입니다. 사용한 생활하수, 농업배수, 산업폐수 등을 버리면 다시 맑은 물로 정화합니다. 넷째, 생태기능입니다. 수중생물, 저서생물, 수면생물 등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섯째, 주운기능입니다. 배를 이용한 운송수단을 제공합니다. 여섯째, 위락기능입니다. 낚시, 수영, 요트, 수변문화 등 다양한 위락활동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일곱째, 발전기능입니다. 재생에너지 중 가장 경제성이 높은 수력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제가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관광기능입니다. 먹고살기 힘든 북한주민한테는 강변의 아름다운 경관이 그림의 떡일 수도 있지만,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관광명소든 누구나 찾아가 즐길 수 있습니다.

 

  제가 이제껏 걸어온 금강의 상류부는 무엇보다 이수기능이 중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용담댐과 대청댐을 설치해 전주와 대전, 청주 등에 생활용수와 산업용수를 공급하는 것은 금강이 갖고 있는 이수기능을 활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앞으로 걸어갈 중류부와 하류부의 금강이 갖는 중요한 기능은 배수 정화기능이 아닌가 합니다. 댐을 막아 공급한 각종 용수는 도시민과 산업체들이 사용 후 다시 강으로 흘려보냅니다. 유입된 용수가 강의 자정기능을 초과하면 과학의 힘을 빌려 정화한 후 강으로 배출합니다. 정부가 세종시, 공주시와 부여시에 보를 설치한 것은 이수 기능을 제고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 건설이 환경단체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친 것은 이수기능을 높이려 보를 막으면 강물의 체류시간이 길어져 정화기능이 떨어짐에 따라 수질이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보를 둘러싼 논쟁이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과 관계없이 진영싸움으로 변질된 듯싶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금강에서 사라진 기능은 주운기능입니다. 호남선 철도가 개통된 1914년 이전만 해도 군산의 금강하구에서 부강포구까지 다녔던 배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몇 곳에서 관광선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자연의 강으로서 자리매김했을 때 주운기능이 돋보였던 금강이 문명의 강으로 변신하면서 주운기능이 사라진 것은 화물운송에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금강 강변 곳곳에 나루와 포구 등 주운의 흔적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런 흔적을 하나하나 모아 가면서 금강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금강 따라 걷기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