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10

149. 예천명소 탐방기3(삼강나루)

탐방일자: 2024. 4, 25일(금)탐방지   : 경북예천군삼강면삼강리 삼강나루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경북 예천의 삼강나루를 다녀왔습니다. 삼강나루는 강원도 태백시의 함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경북 봉화군의 선달산에서 발원한 내성천, 그리고 경북 문경시의 대야산에서 발원한 금천 등 세 강이 합류하는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아우라지에 자리한 나루터를 이릅니다.   아우라지는 두 갈래 이상의 물길이 한데 모이는 어귀를 말합니다.  대다수의 아우라지는 두 갈래의 물줄기가 한 곳으로 모이는 어귀를 이르는데,  여기 삼강나루의 아우라지는 에외적으로 세 갈래의 물줄기가 합쳐집니다. 아우라지가 특별히 고유명사인 지명으로 쓰인 곳은 송천이 한강의 본류인 골지천으로 흘러드는 강원도 ..

148. 안동명소 탐방기6(월란정사)

탐방일자: 2023년12월16일(금)탐방지   : 경북안동시도산면원천리내살미 소재 월란정사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제가 들른 정사(精舍)는 경북 안동의 월란정사와 도목정사 등 두 곳입니다. 이번에 탐방한 월란정사가 누정과 다른 것은 대문과 담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뒤늦었지만 큰맘먹고 여덟 달 전에 다녀온 월란정사의 탐방기를 작성하고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검색하다가 ‘정사(精舍)’에 관한 이모저모도 같이 살펴보았습니다.   정사(精舍)란 신앙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종교 건축물을 이릅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을 정사로 명명한 예는 드물고 도교나 유교를 숭상하는 이들의 수련처를 정사라고 칭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정사로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147. 옥천명소 탐방기2(돌팡깨공원)

탐방일자: 2022년8월29일(월)탐방지   : 충북옥천군군북면 항곡리소재 돌팡깨공원동행      : 나 홀로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항골마을에 자리한 ⌜돌팡깨공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이 공원이 금강 변에 자리한 한반도 전망대, 피실나루터, 옥천선사공원, 장계관광지, 청풍정, 이지당, 부소담악 등의 여타 명소들과 다른 점은 주변 경관이 전혀 수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 공원을 찬찬히 둘러본 것은 한반도의 지체구조를 이루고 있는 옥천변성대의 흑색 변성암을 이 작은 공원에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군북면의 항곡리버스종점으로 이동했습니다. 기사분이 이쪽 길을 잘 몰라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되돌아 나오느라 ..

146. 안동명소 탐방기5(월천서당)

탐방일: 2023년12월16일(금)탐방지: 경북안동시도산면동부리 소재 월천서당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안동의 월천서당(月川書堂)을 다녀왔습니다. 월천서당(月川書堂)은 조선중기의 문인인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이 1539년(중종 34)에 건립하여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던 서당으로 1982년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입니다. 월천 조목은 경상북도 예안 출신으로 본관은 횡성(橫城)이고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월천(月川)입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낙동강을 따라 걸어 월천서당에 이르는 길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날 큰비가 내려 도로가 젖은 데다 바람이 드세게 불고 눈보라가 휘날려 우산을 받쳐 들고 긴 강을 따라 걷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중간에 물..

145. 구미명소 탐방기2(월암서원, 금오서원, 동락서원)

탐방일: 2024년6월5일(수)탐방지: 경북구미시 소재 월암서원, 금오서원, 동락서원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구미시의 월암서원(月巖書院)과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구미시는 신라 초기에 일선군으로 불린 후 조선 초기 1413년에 선산군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978년 선산군의 구미읍이 구미시로 승격되어 선산군과 구미시가 분리되었다가,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되어 오늘의 구미시가 된 것은 1995년의 일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一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중환이 언급한 일선(一善)은 선산(善山)으로 오늘의 구미시를 이릅니다. 이중..

144. 의성명소 탐방기1(관수루)

탐방일: 2024년5월21일(화)탐방지: 경북의성군단밀면낙정리 소재 관수루동행    : 나 홀로     경상북도 의성 땅은 올해 들어서야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서 처음 밟아 보았습니다. 동서로 길게 뻗은 의성군의 1읍17면 중 낙동강의 본류와 만나는 읍면은 서쪽의 다인면과 단밀면뿐입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의성 땅을 밟은 것은 지난달 풍지교를 건너 삼강합수점으로 가는 길에 다인면을 살짝 지났고, 이번에 낙단보를 건너 낙동강의성휴게소로 이동하는 길에 단밀면을 지난 것이 전부입니다.    의성 땅에 세워진 최초의 나라는 삼한 시대에 세워진 조문국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는 고려사 지리지에 "의성현은 본래 조문국인데 신라가 취했다. 경덕왕이 문소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의성부로 승격하여 현종 9년(101..

143. 상주명소 탐방기 3 (도남서원 및 낙암서원)

탐방일: 2024년5월9일(목)/2024년5월21일(화)탐방지: 경북상주시 소재 낙암서원과 도남서원동행   : 나 홀로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고 했습니다. 상주는 2백 년 가까이 경상감영이 자리했던 영남의 대표도시로 부유한 사람이 많았고 또 이름난 선비나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았습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과 식산( 息山 ) 이만부( 李萬敷 ) 등은 조선시대에 상주가 배출한 저명한 유학자들입니다.    서원(書院)이란 조선 중기에 보급된 사립 교육기관으로 오늘의 사립대학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본관이 상주인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선생이 풍기군수..

142. 상주명소 탐방기2 (경천대)

탐방일: 2024년5월9일(목)탐방지: 경북상주시 소재 경천대 및 무우정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상주 제1의 관광지인 경천대(擎天臺)를 탐방했습니다. 하늘이 지은 절경이라 하여 자천대(自天臺)라고도 칭해졌던 경천대는 빼어난 경관의 자연과 충신의 입절지(立節地)라는 인문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낙강제일경(洛江第 - 景)⌟입니다.   경천대(擎天臺)란 경북상주시사벌국면삼덕리에 소재한 무지산 동쪽 자락의 앞을 흐르는 낙동강 좌안의 바위로 된 대(臺)를 이릅니다. 이 대는 대 밑에 기우제 터 우담(雩潭)이 있어 상산(商山)의 신성지로도 알려졌습니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채득기(蔡得沂, 1604~1647) 선생의 호가 우담(雩潭)인 것은 선생께서 여기에 무우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기 때..

141. 상주명소 탐방기1(공검지)

탐방일: 2024년5월9일(목)탐방지: 경북상주시공검면양정리 소재 공검지(일명 공갈못)동행    : 나 홀로    상주는 한때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던 경상도의 대표적인 도시였습니다. 조선이 전국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8도로 나누고 감영을 설치한 것은 태종 13년인 1413년의 일입니다. 당시 상주에 감영을 둔 경상도는 청원 · 옥천 · 보은 · 영동 · 황간 일대가 충청도에 이관되어 그 면적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8도 중에서 가장 넓었습니다.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간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3년 후인 1601년의 일입니다. 임진왜란 중 관군이 북천(北川)에서 왜군에 대패(大敗)해 상주성이 함락됨에 따라 상주가 감영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140. 예천명소 탐방기2(쌍절암)

탐방일: 2024년5월1일(수)탐방지: 경북예천군풍양면우망리 소재 쌍절암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경북 예천의 쌍절암(雙節岩)을 들렀습니다. 쌍절암은 임진왜란 당시 이 지방 사대부인 정영후(鄭榮後)의 부인과 오누이가 정절을 지키고자 왜적을 피해 낙동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곳입니다.   정절을 지키고자 죽음을 택한 것은 고려의 여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이는 고려의 여인이 조선의 여인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고려의 여인은 경제권을 가지고 있어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유지된 것은 조선 전기까지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